성병희 - phobophobia

 

phobophobia
성병희 (BYUNGHEE SUNG)
2018.5.17 – 6.3

phobophobia (포보포비아)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하는 증세를 가리키는 이 단어는,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고
그저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림의 색깔과 메타포만 보고 외면하는 사람들을 가르키는 말이기도 하다.


나에게 그림은 날카롭게 상처를 후벼파는 칼날 같은 존재이다.
보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직면하게 하는 것.
한 번 더 아프지만 바라보고, 알고 다시 걸어가게 하는 것.
아프지 말라고, 세상은 따뜻하다는 따위의 말들은 진정 아픈 사람에겐 위로가 되지 않는다.

너만 아픈게 아니라고, 나도 아프다고 자신의 통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나에게 예술은 우회나 살짝 덮어버리는 포장지가 아니라 실체를 보고,
쓰리지만 직접 바라볼 수밖에 없게 하는 정공법이다.

팟캐스트 : 공도사

SUNG Byung Hee <phobophobia>

 

우리는 목적 없이 고통당하는 일에 길들어 있다.
고통의 잉여에 매혹당한 채,
우리 자신의 상처에 우리를 비추어보면서 행복해 하며.
– 에밀 시오랑

갑자기 무언가에 홀리듯 이 그림을 그렸다
어떤 상황이나 사람에 의해 희생되어진 많은 사람들의
비석처럼 ,붉고 뭉글거리는 고깃덩어리로 놓여있는 양의 머리를….

희생양[scapegoat]_acryl on canvas_162x131cm._2018

I drew this painting as if I were suddenly fascinated by something, a head of sheep as a red and squashy meat like a tombstone of many people who have been sacrificed in any situation or man.

유폐[confinment]_.acryl on canvas_162x131cm_2018.

유난히 추웠던 겨울.
이상하게 변형된 형태의 인플루엔자들에게 연속으로 펀치를 맞으며 몸과 정신이 다 갉아 먹힌 느낌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부의 겨울과 그 안의 강력한 전염성 우울은 스스로를 가두어 격리시키게 한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자발적 고립을…

질식[Suffocated]_.acryl on canvas_162x131cm_2017

나의 아름다운 도살장[my wonderfulslaughter house]_acryl on canvas_131X162cm._2017

<포보포비아, 두려움과 두려움의 붉거나 푸르른 양상들>
맹준규

성병희는 우리가 기피하는 대상들과 스스로 마주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와 같은 형상들이 자폐적 우울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그림에서 피와 뼈, 살점과 내장 그리고 충혈된 눈과 산소 호흡기는 우리 현실에서의 예외적 상황들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대상들에 골몰하는 행위를 사뭇 병적인 것이라고 느끼지만, 우리의 세계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대상들로부터 구성돼 있음을 내심 알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안정적으로 흘러가도록 하려면 이러한 예외나 사고를 제한하고 통제해야만 하는데, 이는 그 자체로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여 우리 현실의 표층적 차원을 강화한다. 따라서 어떤 이야기나 소재들이 고립적이고 사적인 성격을 지닌다면, 그것은 사회가 특정 대상이나 발화들이 숨겨질 것인지 나타나야 할 것인지의 구분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분열이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우울이 타자에게 소통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울 자체만큼은 모두에게 필연적이고 내재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달리 말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가늠할 수 없는 한편, 우리 모두가 고통스럽다는 사실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사회는 종종 아픈 것, 고통 받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를테면 ‘사회적 내홍’과 같은 표현들은 사회를 인격화시키는 것은 물론, 개인 구성원들의 현상적이고 심미적인 상태를 총체적인 사회적 상태로 묘사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예술가에 의해 행해지건 혹은 그렇지 않건 일종의 미학적 서식을 필요로 한다. 성병희의 그림들 또한 이와 같은 사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 사이의 관계를 미학적으로 설명하고자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몸을 문신으로 가득 메운 소년 소녀들의 모습에서, 문신은 시퍼런 멍자국처럼 온 표면으로부터 출몰한다. 이는 관객들에게 신체 장기나 근육 섬유들을 조형적으로 연상시키고, 개인의 내재적 고통을 호소하는 정상성의 사적 부정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더 분명한 차원에서, 문신들은 사회적 고통의 전형적인 상징물들-뒤집힌 배, 폭탄, 전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와 같은 이중적인 구성은 조형적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이고, 때문에 고통의 사적 측면과 공적 측면을 동시에 지시한다. 이 두 관계는 근본적으로 불연속적인 것이지만, 사회적 고통의 형태를 시각화하는 욕망을 매번 새로운 것으로 만든다. 결국 고통의 미학은 거듭되고, 변주된다.

성병희가 제시하는 안과 밖, 감추어진 것과 드러난 것이라는 표층을 둘러싼 서사는 그런 점에서 핵심적이다. 표면에서 억압된 것의 회귀와 출현은 비록 잠재적이기는 하나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것의 회귀는 문학적 수사와 조형적 서식을 경유한다. 튀어나올 듯 큰 눈과 붉은 눈시울은 사적이고 충동적인 차원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그것의 ‘드러남’으로서의 표현인 뼈와 붉은 살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다”는 공포의 모호성을 강화한다. 살갗이 발가벗겨진 양의 머리에서 우리가 느끼는 스산함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전과 동일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양의 눈과 그 안에 담긴 모호한 심연이다. 즉 내적 차원이란 표면이 아닌 것, 단순한 부정성으로 언급된다. 그런 점에서 성병희의 작업들은 우리가 공포스러운 것이라고 여기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있지만, 오히려 공포와 우울이 드러난 것과 감춰진 것이라는 조형적 설정으로 상대화되는 과정, 두려움의 체험에 관한 조형적 불가해성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 그 자체가 아닌, 두려움이 지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라는 이중적인 차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에 관한 견해는 사람들이 통념적으로 이해하는 무의식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의식과 상관한다. 달리말해 두려움과 우울이 그 소재가 아닌 미학적 서식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맨-홀[Man-hole]_acryl on canvas_162x131cm_2016.

머릿속을 복잡하게 돌아다니며 항상 허무감과 죽음을 유혹하는 생각들을 물속을 유영하는 붉은 금붕어로 표현하였다. 그 생각의 강속에 빠져서 얼굴만 내민채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생각의 핏줄 속에 묶여있다. 바닥에 있는 금붕어는 이미 죽어버린 생각들의 한 표현이다.

부유하는 생각들_papermache에 아크릴_39x102X65cm_2014.

(L)자아[Ego]_acryl on canvas_61x73cm_2017 / (R)자학[Masochistic]_acryl on canvas_53x65cm_2017

(L)직면[confrontation]_acryl on canvas_53x65cm_2017 / (R)침몰[Sinking]_acryl on canvas_130x130cm_2017

심연속에서 세속화되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자신의 공포감에 익숙해지고, 거기서 빠져나오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며, 어두운 심연 속에서 세속화된다.
– 에밀 시오랑

Boy-we,Bowie_acryl on paper_2017

(L)바라보다[Seeing]_acryl on canvas_61x73cm_2017 / (R)버팀[endurance]_acryl on canvas_91x117cm_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