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전 리뷰(이인복)

1. 현대 사회라는 배경적 풍경 없이 공포를 생산해낼 수 있을까?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공포 서사들은 대부분 사회의 음지에 뿌리를 박고 자란다. 고도의 발전된 문명과 극한의 폭력이 공존하는 동시대는 공포를 생산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자양분을 축적하고 있다. 공포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그 서사구조를 변형시키며 시대와 함께 자라는 형국이다.  웍밴드 공이 공포를 코드로 삼아 현대 사회를 무한한 해석과 확장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 주제, 먹는 사람을 의미하는  ‘식·인’이 가진 공포의 코드는 무엇인가?

2. ‘나는 음식을 먹는다.’ 이같은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먹는다’라는 행위이다. 먹고 사는 문제만큼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먹는 것에 대한 한국사회의 포커스는 분명 과하다. 이곳에서 이걸 먹으라하고, 집에서는 저걸 만들어 먹으라 하고, 심지어 인터넷 개인방송에서는 다양하게 많이 먹으라고 한다. 먹는다는 행위에 지금처럼 집중된 시기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먹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보다 큰 문제는 ‘나는 음식을 먹는다’라는 문장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음식을 입에 넣는다. 음식을 소비하는 양이 늘어날수록, 그 종류가 다양해질수록 점점 더 우리는 그것에 대해 까막눈이 되어간다. 실상 우리는 눈을 감고 음식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공포는 여기에 있다.

임동현_모니터밥2, 40×60, Wood cut on Paper, 2017. 임동현_신문 밥, 40x60cm, Wood cut on Paper, 2017.

작가 임동현은 ‘나는 음식을 먹는다’라는 문장의 주어에 주목했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때로는 바닥에서, 혼자, 더러는 같이. 그저 눈앞에 놓인 음식에 집중한다. 먹는 행위 외에는 어떤 군더더기도 없다. 그러나 이같은 장면은 매체에서 표상되어온 ‘먹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거리가 멀다라고 할 것도 없다. 각종 음식 프로그램에 먹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용의 포커스는 온통 음식에 맞춰져 있으며, 등장하는 인물도 단지 먹고 뻔한 감탄을 입으로 출력해낼 뿐이다. 이와는 달리 작가의 식사에는 먹는 사람만이 존재한다. 미디어에서 만들어내는 ‘먹는다’는 판타지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물들은 먹는 것도 일인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한끼를 밀어 넣는다. 광대같은 표정으로 짓는 감탄과 이보다 더 참신할 수 없을 비유적인 음식평은 사라지고 대체로 무덤덤한 정서, ‘무기력’과 ‘무능감’이 만연해 있다. 임동현의 작품을 마주할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여기서 온다. 음식 판타지가 만들어내는 픽션을 걷어내고 드러나는 먹는 사람은 그저 ‘먹고 살’뿐이다. 삶 속에서 식사는 즐거운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이것을 먹고 모니터 속의 일감을 끝내야 하며, 바닥에서 일어나 남은 작업들을 마무리하러 가야한다. 삶 속에서 행해지는 ‘먹는다’의 행위 대부분은 즐거운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다.

3. 철학자 아노르노는 “아우슈비츠는 사람들이 도살장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곳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도살장이 아우슈비츠로 비유될 수 있는 이유는 방법적 측면에 있다. 공개된 장소가 아닌 사람들이 찾기 힘든 깊은 숲 속에 몰아넣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대량 학살한 방식은 지금의 도축시스템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줄지어 매달려 있는 도살된 동물과 바닥에 널부러진 내장과 부속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잡은 소녀. 흥미로운 점은 아우슈비츠에 가스밸브를 열고, 불을 지른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도축장에도 동물을 죽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소나 돼지가 스스로 목줄을 매고 죽지는 않았을 것이니. 그렇기에 직관적인 작업의 형식이 주는 공포도 강렬하지만 도살장에서 발견된 인간의 존재는 더욱 흥미롭다. 작가는 여기에 더해 살육의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소녀 그리고 여성에게 그 칼을 맡김으로서 도축의 폭력성을 극대화한다. 여기에 더해 공간의 내부를 그대로 우리에게 시각화하여 제시함으로서 도축자가 겪을 폭력적 상황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관객에게도 경험케 한다.

성병희_나의 아름다운 도살장[my wonderfulslaughter house]162x131cm.acryl on canvas.2017

사람과 동물의 유사성 혹은 등가성은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인정받기 어렵다. 돼지의 유전자가 아무리 인간의 것과 일치한다 한들,
침팬지가 인간의 행위를 아무리 모방한다 한들 그것들의 죽음은 현실 너머에 벌어지는 사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인어는 어떠한가. 여기 시체가 있다. 아니 동물의 사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뭐라 명명해야할지 애매한 죽음의 결과물이 여기에 있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진 손과 발 그리고 머리. 그것도 얼버무려진 장면이 아닌 실제와 동일한 폭력적 장면의 재현이 있다. 인어를 손질하는 장면, 잘 차려진 인어 초밥 접시들, 그리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먹을 수 없는 부위들. 작가 이보름의 작업은 반인반어의 신화적 존재인 ‘인어’를 고깃덩어리로 내동댕이친다. 전시된 이보름의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일련의 내용은 현실의 모순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인어는 인간인가?’, ‘인간이 아니라면 먹어도 되는 것인가’ ‘여타의 가축들이 손질되는 방식으로 인어를 손질해도 되는가?’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명쾌하게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분명히 음식이 도축되는 과정에 대한 폭력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폭력의 과정을 작가는 망설임 없이 인어에게 그대로 적용한다. 손질되고, 차려지고, 버려지고. ‘잔인하다, 폭력적이다’라는 반응에 작가는 반문할 것이다. ‘인어는 왜 안되는데?’. 육식에 관한 당위적인 사실들의 허구성을 인어라는 애매한 개체를 통해 작가는 폭로 한다.

 

 

 

 

 

 

이보름_인어의 상체는 쉽게 상하기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로 분류되어 버려집니다_혼합재로_가변설치_2017

 

동어반복이지만 박철호의 작업은 박철호답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관객을 붙잡고 끈덕지게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순한 구성을 통해 음식 문화의 이면에 존재하는 폭력성과 허구성을 간단히 드러낸다. 레일 위에서 스팸 통조림을 향해 뛰어드는 돼지, 그 결과 만들어진 가공육과 그 속에 머리를 박고 있는 사람의 모습. 탈감정화된 죽음의 모습을 작가 특유의 풍자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실상 식탁의 앞 뒤 과정에 존재하는 폭력성의 무지와 외면은 식탁 위에는 아무런 감정도 남기지 않는다. 그의 또다른 작업인 <일체유심조> 는 이같은 무지와 외면을 꼬집는다. 두개골 속에 담긴 물을 마실 수 있는 것도, 대량 학살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도 모두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먹는 대상에 대한 아무런 의심이 없는 상태. 실상 자기 기만에 불과한 탈의심화의 상태에 대해 박철호의 작업은 골똘히 사유하고 응시하게 만든다.

박철호_자살돼지_가변설치_2017

박철호_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_ Wonhyos water]2 동물뼈,인간두개골,물_가변설치_2017

4. 거듭 말하지만 “나는 먹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먹을 것이다. 먹는 다는 사실은 뒤집을 수 없는 삶의 진리이다. 그렇기에 이번전시는 먹는 사람에 대한 의미를 부정하자는 것도, 새로운 음식문화를 모색하자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의 공포전인  <고리>처럼 무언가를 폐쇄하거나 할 수 있는 성질의 주제도 아니다. 단지 알면서 모른 척하지 말자는 것이다. 차려진 식탁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와 옹호는 이제 접자. 소비사회가, 기업이, 그리고 국가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우린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