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 (4)

공포 :: 食·人 (먹는 사람)
2017.7.11 ~ 7.24
김홍빈 박철호 성병희 신재은 심혜정
이보름 이수진 임동현 최요한

주최 : 인디아트홀 공
기획 : 웍밴드 공(조병희, 이은정)
큐레이팅 : 이은정, 하진
필진 : 배우리, 이인복
진행 : 안돌용, 오원석

먹고 죽은 귀신 상상하기

* 전시 보고 쓴 사람 배우리

<옥자>를 본 바로 그 날 냉장고에 남아있던 족발을 먹는다. 미자가 삼계탕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자애고, 옥자만을 살리지 않았냐며, 남아 있는 족발을 버리는 것이 더 큰 죄라면서. 삼계탕 조그만 닭다리를 뜯는다. 닭이 어디에서 어떻게 얼마나 사는지 알지만, 복날 삼계탕을 거부하는 것은 사회성이 떨어지는 일 아니냐며,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사회적 현상을 인지하는데 이런 붕어도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환기해야 한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 증거와 정황들, 그리고 쏟아지는 해결책들이 확실한 우리의 지식이 되기까지 말이다.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미디어는 아니다. 이 과학자, 저 과학자, 이 기업, 저 기업 소식을 전해주다 보면 일관성이 떨어진다. 그럼 누구에게 기댈 수 있는가, 그건 온 신경세포와 감각이 살아있어 우리보다 세계를 먼저 체험하는 예술가다. 보이지 않는 것 혹은 애써 덮은 것들을 그대로 까발려 보여주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이냐고 의심하게 만들고, 불편하게 만드는 예술가. 불편함을 자꾸만 잊는 편리한 뇌를 가진 우리들을 위해 그들이 모여 공포 조성(혹은 조장)에 나선 것이 바로 <식·인>전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수조가 있다. 뿌연 수조는 몽환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다. 생명은 물에서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나, 신비로운 생명체가 꿈틀거릴 것만 같은 물에 가까이 다가가면 악취가 코를 먼저 찌른다. 물 위에는 플라스틱 조각들이 떠있거나 가라앉아있다. 마시기는커녕 만지고 싶지도 않은 부패한 고인 물이다. 이 물을 멀리 한다고 해서 우리는 안전할까. 하수도관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괜찮은 걸까. 녹조, 미세 플라스틱 조각은 결국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들이다. 심지어 우리는 그런 ‘사실’들을 익히 알고 있지만 화장품, 빨대, 일회용 컵을 쓰고, 폐기물을 버리면서 그것을 가속화 하는 데만 도움을 줄 뿐이다. 당장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무기력만 느낀다. 무기력 자체가 사실은 공포다. 우리는 이대로 물이 썩는 것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이 제일 무서운 일이 아니지 않을까.
이 수조의 악취는 ‘옥수수 쉰내’와 닮았다. 왜 옥수수 쉰내가 날까. 물을 뿌옇게 만들기 위해 작가가 사용한 글리세린에 그 답이 있다. 글리세린의 주재료가 바로 GMO 옥수수다. 그 성분을 알 수 없게 무색, 무취에 그저 약간 미끈거리는 것이 썩으면서 자신의 본 모습을 찾은 것이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되돌아올지 모르는 것은 미세플라스틱만이 아니다. 수조를 연출한 김홍빈은 이것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몰라도 한다. 그러니 예술가가 건네는 체험을 믿는 건 밑져야 본전이다.

김홍빈_Rosebud_1500x70x1500
영업용 수족관, 물, 각종 공업사에서 깍아내고 남은 플라스틱 조각들,글루세린, PVC풀,나무좌대
(2017)

심혜정 작가는 공포 체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VR을 이용했다. 먹히기 위해 대량으로 삶이 연명되는 것들―더 이상 가축이 아닌―이 한꺼번에 죽어나가자 살아있는 것까지 모두 구덩이에 몰아넣어졌다. 죽기 직전 살았던 것들이 보았을 법한 풍경과 내질렀을 법한 소리가 영상에 그대로 담겼다. 그러니까 먹(고 죽)을 생각만 하던 나는 손과 다리가 박탈된 가상현실에서 그야말로 먹히는 귀신이 되었다. 7분 여 동안 빠져나갈 길 없는 구덩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떤 정지 상태를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일 뿐이다. 비명도 아마 나의 것일 게다. 가상을 통한 역지사지, 세계의 극히 일부분만 체험하고 인지하는 우리들을 위해 준비된 작품이다.

작가는 비명 소리와 그들의 존재에 대한 불편함을 흙으로 덮어 묻어버리지 않았다. 그 소리를 꺼내놓기 위해 언제든 준비하고 있었고, 마침 이번 전시를 만났다.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포를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억압된 것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화해하는 것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공포를 주는 것은 공포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심혜정_사라진 목소리_VR_7’24″_2017

신재은_삼손삼솜_가변설치/퍼포먼스_솜사탕 기계, 설탕, 인삼향_2017

영국산 비타민 씨를 먹으면 과연 피곤에서 탈출하는가? 비타민 음료를 마시면 우리는 나이를 거꾸로 먹을 수 있는 건가. 옥수수수염차를 마시면 브이라인이 된다고? 뭔 헛소리. 여기 웰메이드 헛소리가 또 있다. 촘촘하게 박힌 빨간 알약과 ‘삼솜’의 효능을 알리는 기사. 노화를 방지하고, 면역력을 키우고 불끈불끈 힘이 솟길 바라는가? 그렇다면 신재은의 ‘삼손삼솜’이 있다. 알프스의 마테호른 만년설 아래서 캐낸 인삼을 쪄 즙을 굳히고 빻아 솜처럼 뭉쳐 먹기만 하면 피부가 좋아지고 삼손처럼 힘이 솟는 삼솜. 작가는 권위의 상징 흰 가운까지 입고 솜사탕 기계에서 설탕을 넣어 삼손을 뽑아낸다.

작가는 먹을 것에 모든 욕망을 떠넘기는 사람들을 보았다. 남보다 더 좋은 때깔을 내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각종 방송에서 떠들어대는 ‘슈퍼푸드’를 구매하는 것이다. 그걸 산다고 해서 슈퍼때깔이 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구매한다고 해서 복용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다 먹기도 전에 금방 새로운 슈퍼푸드가 나온다. 다 먹었다고 치자. 그리고 좋다고 그것만 먹었다고 치자. 그러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하고, 건강검진을 받아본다. 영양 불균형 판정을 받는다. 너무 무섭다. 빨간 약 앞에 빽빽하게 누워있는 효능이 말한다. ‘건강해지고 싶으면 제발 넘의 이야기를 듣지 말라.’

신재은_BERRy BUFFET_mixed media_150x120x48cm+2017

이번 공포전에서 가장 조용한 작품은 최요한 작가의 사진이다. 언뜻 보면 그냥 과일이나 그냥 채소 사진. 공포에 어울리지 않게 작품들은 너무나 얌전하다. 어떤 공포를 불러일으키지도 않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도 아리송하다. 그야말로 일상적인 사진들. 그렇지만 흑백의 브로콜리는 분명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을 터다. 사진은 앞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진의 뒷면을 살펴야 한다. 봄이 오지 못하는 곳은 빼앗긴 들이 아닌 농약을 친 들이다. 봄이 와도 그곳에는 어떤 생명도 접근할 수 없다. ‘작물’이라는 것도 이미 생명이라고 칭하기 어렵게 된지 오래 된 것들이다. 최소한의 애도로 죽은 나비들을 받치고 있는 손. 우리가 매일 먹지만 낯설게 찍힌 파프리카와 양파, 체리와 마늘과 버섯. 이 사진을 잠시라도 들여다본 이라면 아무렇지 않은 사진들이 왜 이렇게 어색하고 낯선지에 대해 탐구해보았을 것이다. 먹히기 위해 키워진 것들이 갑자기 독사진을 찍었으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이 우리도 존중받을 수 있는 하나의 개체라고 말한다. 주체적이던 야생의 시기는 이미 지났지만 요리의 재료이기 전에 하나의 생명으로서 사진의 피사체로 나선 것이다. 어쩌면 최고의 공포는 우리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들을 맞닥뜨릴 때다. 우리가 이렇게 무지하고 무감각했던가.

최요한 -덫, 아무도 모른다- 연작_2017

공포전에 시각적으로 공포스러운 것은 사실 거의 없다. 모두 생각보다 발랄한 겉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먹을 것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실상을 파고 들어가야만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공포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다. 작가들이 감지한 현상 자체의 공포와 우리는 왜 몰랐을까 하는 무감각에 대한 공포. 그리고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공포를. 하지만 작품이 주는 감정이 공포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들은 결국 아름다운 결말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불쾌한 것 자체가 미감과 직결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건 불감증을 가진 지식변태의 이야기다.) 아름다운 결말이라는 것은 오직 ‘나’의 욕망만 채우는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말을 거두었을 때 가능하다. 타자들과의 화해에서 오는 질 높은 미감에 대한 이야기다.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뭐라도 먹어야 했겠지만, 먹을 것이 널리고 널린 지금 그런 말로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하기보다 분별력과 책임을 키워야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먹혀 죽은 귀신이 되는 상상력을 말이다. ‘먹을거리’ 앞에서 소외되는 자, 소외되는 것들이 없어지면 우리를 괴롭히는 공포도 자연스레 사그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