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네번째 공포 - 식.인

4번째 공포 :: 식·인
2017.7.11 ~ 7.24
김홍빈 박철호 성병희 신재은 심혜정
이보름 이수진 임동현 최요한

누가 먹는 것을 두려워하랴?

인디아트홀 공의 2017년 여름 기획 ‘공포’ 전시는 <식.인>이다. 먹는 인간!

인간은 먹는다. 먹는다는 것은 일상적인 것이다. 그런데무엇이 무섭다는 것인가?

돌이켜 보면 인간은 늘 먹을 거리에 대해 걱정해 왔다. 인간의 먹을 거리에 대한 걱정이 ‘잡식 동물’의 실존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1]인간은 자연 속에서 무엇을 먹을 수 있고, 무엇을 먹으면 안되는지 알아야 했다. 인간의 인식 능력과 기억력 그리고 정보의 공유를 통해 인간은 자연이 제공하는 먹을 거리에 대한 지혜를 축적해왔다. 그리고 ‘요리’를 통해자연의 생물종들이 갖는 독성과 방어력을 무력화시켰다. 요리는 인간에게 뭐든 먹을 수 있는 생태적 위치를확보해 주었다.

인간은 식량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만, 자연은 그 식량을 인간에게 제공할 의무가 없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인간의 경작과 식량 생산 방식은 식량 공급원으로서의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있다.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풍부한 음식에 가려져 있는 현실은 생물학적 다양성의 빈곤이며 종말이다.

과거의 먹을 거리에 대한 걱정은 현대에 먹을 거리에 대한 공포로 이어졌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먹을 음식 재료들을 자신이 공급하지 않는다. 내가 먹고 있는 이 음식이 어디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되었는지 알지 못함으로 우리는 불안하다. 유전자 변형, 농약의잔류, 환경 오염에 의한 각종 독성 물질들… 먹을 수 있는것과 없는 것을 구별해야 하는 자연 속에서의 인간은 이제, 먹을 수 있는 것들에 ‘포함되어 있을지 모르는’ 먹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함유물로, 원산지 표시로,생산자의 이름으로 구별지어져 있다고 해도 별반 달라질 것은 없다.

이러한 현대인의 먹을 거리에 대한 불안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각종 정보에 의해 해소되기도 하지만,  매스미디어는 이러한 불안을 조장하기도 한다. 먹을거리에 대해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각종 ‘유기농 작물’과 ‘동물복지인증’과 ‘안전한’ 산지 등을 구매하며 스스로 현명하다고 믿는 ‘소비자들’이 된다. 새로운영양학적 지혜를 쏟아내는 미디어에 의해 우리의 선택은 강요되고 정작 그 생산의 과정에서는 소외된다.

‘먹는 것은 정치적인행위이다’

2017공포 <식.인>은우리가 먹는 것,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음식 파노라마에 대하여 질문한다. 왜 이렇게 먹을 수 밖에 없는지, 더 낫게 먹을 수는 없는지, …음식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린 현대 사회에 질문한다. 금식, 단식, 혼식, 폭식, 불식 등 음식에 대한 인간의 강박적인 관계에 대하여 고찰한다.

오늘 날 한국인들의 모든 관심은 먹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듯 하다. 케이블 채널과 SNS, 인터넷 방송에서 우리는 먹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많이 먹고그저 먹고 뭐든 먹는다. 거기에는 먹는 사람들이 있고 먹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함께 먹지 않는다. ‘먹는다는 것은 공동생활 속에서만 정당한의미를 갖을 수 있다’고 하는 벤야민의 말은 둘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암시한다.[2]화면 안의 ‘먹기’는 공동의 삶이 아닌 대리만족이고 스펙타클이 된다. 여기에는 인간의 공동체와 연결되는 타자의 삶이 존재할 수 없다. 특정한 음식은 특정한 국적과 문화와 연결되어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음식은 자신과 타자의 차이를 분명히 하여 그들을 미개하거나, 잔인하거나, 비인간적인 편으로 밀어부친다. 음식에 대한 신화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욕망, 사회적 금기와 연결되어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식.인>의 예술가들이 먹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은 왜일까? 우리의 미각, 우리의 감각을 길들이는 것을 ‘감각적 정치성’이라고 부른다면, 현대 자본주의는 우리의 가장 자유롭고 사적이어야할감각-미각을 길들여 개개인의 개별성과 차별성을 없앤다.

<식.인>의 ‘예술적 실천들’ 안에서 음식과 요리, 먹기의 통상적인 관계는 파괴된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식탁은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밥상’이고 누군가에게는 ‘사회적 분할’이다. 그리하여 일견 자연스러운 먹거리의 풍경은 스스로에게 낯설게 된 어떤 사유의 장소, 공론의 장이 된다.

현대 자본주의 생산체계는 우리에게 공통적인 것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우리를 말단의 소비 동물로 전락시킨다. 한나 아렌트는 음식물과 같은 소비재들을 생산하는 노동은 ‘인간의동물적 실존성’을 환기시킬 뿐이라고 말하며, 근대 이후, ‘먹는 입들’의 싸움이 공론의 장을 식탁화하였다고 말한다.[3]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먹는 입들’의 싸움에숟가락 하나를 더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싸움이 인간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의 종 자체를 위협하는지,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가로막는지 잠시 ‘먹기’를 멈추고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디아트홀 공의 네번째 공포전 <식.인>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갇혀 버린 음식의 사슬에 문제를 제기한다. 스스로를감각의 말단에, 감각의 수동성 안에 가둔 인간에게 질문한다 – 우리는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

 

하진 (웍밴드 공)

[1] 마이클 폴란, 잡식 동물의딜레마. (조윤정 옮김), 서울, 다른세상, 2008.

[2]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7.

[3]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태정호옮김), 서울, 한길사,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