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공포 :: GORI​ 리뷰

세번째 공포 : 고리 (GORI)
서평주. 성유진. 송호준. 여상희. 오재우
2016.7.28 – 2016.8.14

주최 : 웍밴드 공
기획 : 이은정. 조병희
행정 : 오원석
디자인 : 전민수
영상. 사진 : THE VIDEOS
후원 : 서울문화재단

TK-21 라 뤼브의 편집장 장-루이 포와트뱅

전조 징조!
언제나 숨어있는 새로운 핵의 신에 대하여 그리고 전파되는 좋은 소식에 대해 주의 하라.

I. 신학적 관점

새로운, 그러나 숨겨진 신

물론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물론 몇몇의 사람들은 그것에 흥미를 갖는다. 물론 우리 각자에게는, 이러한 조용하고 태연한 이 괴물들로 나타나는 위험을 확산시키는 무의식의 일종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감히 생각하지 못한다. 두려움 때문에?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라면, 위험으로 고려 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정서가 그렇게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발전소 혹은 폭탄, 에너지 생산을 돕거나, 파괴의 관점으로는 응축된 힘, 핵에 관련된 모든 것은 비밀의 인장 깊숙한 곳에 표시된 시작이다. 현실적인 결과, 혹은 짐작되는 결과, 얻어진 지식들이나 있을 법한 결과들, 그러나 측정할 수 없는 결과들, 핵에 관한 이 모든 것은 오늘날에는 마피아적인 침묵의 계율의 카테고리와 이어져 있는, 사회적-종교적 금기의 카테고리에 지배를 받는다.

어쨌든, 직접적이거나 직접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핵에 관련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고요함 혹은 하늘에서 내린 계율에 순종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의 문제이기 때문에 거짓말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사학적 영역의 모든 것들은 그냥 받아들여 지거나, 공모한 성직자들의 설교의 기쁨과 섞여 버린다. 우리의 하늘은 이렇게 진실 혹은 거짓, 유독성 혹은 환영의 구름으로 채워진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직접적이지 않은 절차에 따라 해야 할 일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학적인 형상들에 의해 가장 자리가 둘러져 있고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그것을 결정짓는 이 형상들 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견해에 대해서는 역시나 침묵의 계율, 적어도 회개하는 침묵이 지배하고 있다. 최상의 아버지나 어머니, 다르게 말해, 불안정한 양으로 조제된 위협에 의해, 정치인 혹은 행복을 파는 사람들로 불리 우는 그들은 질서를 지배하도록 한다.

물리적, 수학적 미스터리에 전문가가 아닌 이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주어진 것들에 얽인 비밀 안에서 꺼내진,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으며 범접할 수도 없는 진정한 신은, 어딘가에 그리고 모든 곳에 존재 하며 동시에 신에 어울리게 비 물질적인, 신에 걸맞게 위험하고 앙심을 품은, 선하고 기쁨 혹은 신에 걸맞게 고통에 직면해 휴식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자와 맞닿아 있다. 기쁨들은 모두의 소명, 실내공기 조절 장치, 사실적 근거들, 진동적인 이미지, 필요 이상의 소리들에 대한 일반적인 대화의 요소들이 된다. 기쁨은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질서에 종속시키고, 원초적 카오스의 모습에 이러한 정돈 방식으로 그렇게 지배하도록 하는 것을 증명한다: 일반적인 음식, 움직이는 기계들을 위한 배터리 충전(등이 그러 하듯이)

간헐적 이지만 확인된 불변성의 에너지, 흐름은 기쁨의 단위로 이익을 측정할 수 있게 한다.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으로부터 신이 있다고 말을 하고, 의미론적인 도약과, 그렇게 하도록 하는 약간의 권위를 얻게 하는 양적인 도약이 있다.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지배하고, 생산을 방해 할 수 있을 때 아무 때에나 거만을 즐길 수 있는 그들의 신념을 가지고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는 세계 유산의 등급의 기다림을 지속하게 하는, 오래된 건물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한다.

그리고 나서 두려움은 그의 코를 향하도록 되돌아 온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과자 선물은 너무나 많고, 사람들은 그것을 되풀이 되도록 시도하고 또 다시 시도 하는 것을 서두르도록 한다. 그리고 나쁜 새의 징조는 영악한 목소리에 의해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곧 사라질 기침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악마는 숨어있는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신은, 진정한 신은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숨어있다.


보이지 않는 것이 폭발한다.

보이지 않는 핵 에너지는 두 배이다: 왜냐하면 과학적이며 사회적인 혹은 사실적인 여건, 혹은 사실 그 자체로 함께 존재 하기 때문이거나, 그의 통행의 그 어떠한 눈에 보이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딱 그만큼만 그것을 남긴다. 전기가 흐르는 철탑 신탁의 커다란 토템을 제외하면, 산맥들에 놓인, 전 세계를 가로지르는 골짜기에 놓인 철 십자가, 한정 할 수 없고, 그의 목소리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어떠한 지글거리는 소리를 듣도록 내버려 두는, 그의 존재의 중요한 계주이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진 곳에 과잉 보호된 건물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이것은 물론 선하고, 너그러우며, 인간의 행복에 신경을 쓰는 신, 바로 그 부드러운 그의 얼굴이다.

그리고 한편 괴물 같은 또 다른 그의 얼굴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거의 보지 못하거나, 교묘하게 걸러진 고문서의 이미지 안에서 그것을 본다. 이러한 또 다른 얼굴은, 그의 힘에 의해, 그의 효과에, 그리고 그의 결과에 의한, 무한한 폭력의 파괴의 그것이다. 이 얼굴은 같은 신에게 속한 것이다.

모든 이들이 이것을 알고, 그 누가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러면, 모든 종교에서처럼, 인간들은 그들을 이 두 얼굴로부터 분리시키는 계략을 생각해 낸다. 핵 에너지의 가능한 사용법의 이 두 가지 측면과, 그들의 신의 이중적 본질을 믿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이성을 초월한 미스터리가 될 것이다. 첫 번째 본질의 거부를 정당화 하는 것을 허락하고 두 번째 본성을 내포한 잠재적인 위험들의 이름으로 선의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인간의 그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화를 잘 내고 보이지 않는 신의 오래된 종교적 의미에서의 신에게서 오는 그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불타오르는 덤불처럼, 아무도 이것을 말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가?

그리고 나서 선한 신이 논의의 여지가 없는 방법으로 나타났던 이러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폭력적이고 괴물 같은 신과 같은 것이었다. 체온 조절 작용이 안심이 되는 행복해 하는 마음은 폭발적이고 위험한 마음이 되었다. 실은, 그의 발명의 실제적 역사 속에서, 이것이 발생되는 것과는 반대이다. 우리는 기쁨의 기계들의 베일을 새로 씌우기 전에 파괴자 기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기후의 온화함의 주창자, 신은 분별 없는 에너지의 폭발을 통해 우선 자신의 존재를 나타냈다. 그러나 곧, 혹은 그들의 피조물의 몇몇 흔적을 통해 표시 되었고, 그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게 머물렀다.

그렇다면 신의 아무런 봉사자가 그것을 할 수 없는 이상 이러한 질문들을 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사회가 예술가들을 부르는 어떤 사람들, 몇 십 년 이래로 붓의 구실을 하고, 변질된 신비함 속에서 옛 신을 재현하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 들 가운데, 현재의 신과 관련된 질문들이 엄습하고, 무엇이 정확하게 신학인지를 보여준다.
II. 해석의 변화

위대한 모든 것

전시회에 나타난 오늘날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성찰의 긴 순환 안에서, 아트 홀 공은 부산과 가장 가까운 핵 발전소에 위치한 장소의 이름인 고리라는 제목아래, 다섯 명의 아티스트들이 보여 준 몇 몇 핵의 신학적 측면의 면면을 전시했다.

성유진은 거대한 대 벽화(프레스코) 속에서 파라오 이집트의 거대한 폭탄과 현 세계의 시각적 요소들의 이미지를 서로 교착시켰다. 그녀는 울창하지만 침략적인 숲에서 핵의 괴물 같은 얼굴을 숨긴 위험에 직면하여 우리들의 면제에 대한 믿음을 끼워 넣은, 신비하고 신비함 위에 덥혀 있는 한 구석을 들어 올린다. 누트, 하늘의 위대한 여신은 인간들이 발명한 세계에 그녀의 늘어난 몸을 에워 싸인다. 암호화된 제스처와 인간의 규범을 넘어선 에너지를 상기시키는 형상들은 이전 세대에 이미 알려지고 사용될 수 있었다. 그려진 숲과, 외부 세계를 표현하는 모두를 환영하고 보호하는 우리의 믿음, 누트의 몸을 관통해 표현된 대 벽화의 바로 그곳에서이다. 이 숲은 중요한 신학적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나의 모든 것이 가장자리 없이, 그러니까 외재성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외부 외재성이 있다면, 그곳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감춰진 곳에, 파괴의 힘들이 침투할 수 없는 숲 속 그림자 속에 숨은, 그곳이 아니지 않는가? 왜냐하면 이러한 힘들은 인간의 참을성을 뛰어넘는 시간 속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신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미 한 번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러한 파괴의 힘들이, 죽음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무사하고 보호된다고 스스로 믿는 이 작은 세계를 컨트롤 할 수 있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파괴의 힘들이 영원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이해한다.

성유진_Post-Apocalypse_벽화_2016

증식

여상희는 진짜 버섯과 동시에 핵의 버섯들을 닮은 작은 버섯들로 채운 그의 땅과 함께, 이 날에 보여졌던 앙심을 품은 괴물 같은 신을 통해, 가장 잘 알려진 형상을 정말로 진지한 쟁점들의 유머와 함께 장면을 연출한다. 그저 보기에는 버섯의 형상은 꾀 매력적이고, 흉물스런 신의 현현을 나타내는 것 외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버섯의 형상 아래 화를 잘 내고 심술궂은 신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그리고 난 후, 일종의 식물의 형태로서 그것을 통해 통상적인 형태, 이러한 버섯들의 증식이 있다. 그들은 포개지고 확장된다. 이것은 바로 계시가 되었던 현대의 핵의 신의 또 다른 측면이다. 실제로 특별하게 책 안의 종교에서, 하지만 역시 또 다른 대부분들의 그것 안에서, 그들의 신도가 되는 것을 확신케 하는 주된 기능을 위해 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을 하기 위해, 그는 증식 해야만 하고 덜 혹은 더 효과적이거나 헌신적인 그들의 봉사자들의 지역을 통과하면서 그는 그것을 한다. 그것들은 예를 들면, 천사들 그리고 간단히 그를 믿거나, 그의 말이나 메시지를 늘어놓는 그들의 예배의 집행자들이다.

그런데 만약 급속한 증식이 현실의 공간 안에서 더 이상 소리가 없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구체적이고 확산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 질까? 여기서 종교의 면역된 시각과 힘의 증가를 통한 파괴적 시각, 그리고 증식의 법의 제어되지 않는 적용들 사이의 시차를 말하기 위한 훌륭한 방법으로 버섯의 메타포가 작용한다.

여상희_City of Destroy

여상희_Game of Destroy

인식적 경계들

송호준은 유머와, 우리가 새로운 신에 대한 가장 어려운 질문들을 그것과의 차이로 접근한다. 실은,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지각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가장 효과적인 신의 현현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알아채지 못하는 현실의 층 안에서 일어난다.

이 핵의 신은 아주 간단히 감각의 저편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신념이 없는 민족들의 몸과 믿을 수 있는 정신현상 위에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만의 천체 안에서 살고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익히 알려진, 모두에게 그리고 각자에게 삶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 혀를 내미는 방식으로 특히 유명한 익살스러움의 대명사인,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그러한 이미지 너머에, 이것은 인간의 인식과 한계에 대한 질문이다. 사실, 만약 이러한 이미지 옆에 작은 장치에 가까이 간다면, 우리는 옆에 있는 작은 화면 위에 내민 혀의 잠재의식의 출현을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같은 방법으로, 돌에 의해 분출된 방사선의 강력함을 측정하는 가이거 계수기의 곁에, 아름다운 목걸이에 걸려진 우라늄 돌 쪽으로 다가가면서 “당신은 곧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무엇인가의 목소리를 잘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미장센은 핵의 신의 불가시성의 매우 세부적인 특징에 대해,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전염의 힘, 다시 말하자면 감각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힘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한다. 우리는 소재의 영역 안으로, “현실”을 완전히 변형시키는 사람들의 이해의 영역 안으로 침투했다. 우리는 지각되지 않는 모든 층들로 구성된 모종의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감각에 의해 감지되는 이러한 언어들로 해석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매우 고도의 기술의 유일한 장치들인데 이것은 소리와 이미지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사고와 전쟁을 제외한 발전소의 잠재적인 파괴의 힘의 가장 강력하고 근원적인 결과들은 남아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은 더 이상 감지되지 않으나 위험은 인식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전기가 된 원자의 이익의 결과들의 자각을 다시 깨닫는 것으로부터,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한 나쁜 꿈의 형태로, 그것은 가능한 현실로서 환기 되지 않는다.

이 꿈은 매 순간 현실이 될 수 있고, 우리는 오랜 기간에 흔적을 남기는 복잡한 심리의 기제 안에 연루되었다. 이것은 현실 거부이고, 거짓말이며 망동이다.

보이지 않는 신은 보이지 않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시각은 우리의 정신현상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고통에 의해 조절되다. 이러한 신의 불가시성은 구체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방사선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측정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이 우리를 안심시키는데 충분하다는 것에 만족한다. 숫자들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그것을 모두에게 통역하는 단어들 역시 나쁜 소식보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의 심리 작용은 공포와 끔직한 것에 직면하는 것을 보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발명가들이며 만족 할 줄 모르는 주동자들이다.

송호준_죽음과 메롱. 우라늄 목걸이 (Uranium Necklace)

송호준_죽음과 메롱. 우라늄 목걸이 (Uranium Necklace)

송호준_죽음과 메롱. 인류를 위하여 (For Humanity)

이미지들의 금지

오재우는 도상의 신의 현현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드러난 것과는 반대 되는 하나의 노래를 강요하는 것을 만족하는 이미지들, 그들의 언어의 후광을 감싸는 오래된 응답송을 되찾는다.

특별히 한국의 제 2의 도시인 부산과 가까운 곳에 있는 고리 핵 발전소를 방문하는 것과 핵 에너지가 생산되는 장소에서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것을 이 짧은 비디오의 주제로 삼는다. 실은 무의 텍스트가 오직 이미지들과 충돌하지 않는다. 아티스트 정유진의 밴드의 소리만이 보이지 않으면서 더욱 더 신비한 이 공간을 채운다.

오재우는 이 신을 둘러싼 미스터리의 필수 불가결한 각각의 측면을 탐험하며 감지되도록 한다. 이미지들의 언어가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인터넷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이트를 떠나면서, 그는 이미지를 음소거의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 쉽게 가능하기도 하고 원한다면 무시해도 좋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고의로 흐릿하게 하거나 만약 상태가 속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보는 것도 가능한 훼손된 이지미로 교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고리 사이트에서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의 해결 방안으로 크게 보이도록 줌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고 합법적이라는 것인가? 가질 수 있고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상태의 핵 에너지와 인터넷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아주 힘이 센 이 신의 성직자의 더 높은 당국 정부, 그들의 행위의 적법성과 관련된 질문들은 아주 복잡하지 않고, 이 점에 대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효과적인 작업을 통해 오재우는 보는 것의 불가능성, 보는 것의 금지 조차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몇몇 장면은 이 장소에서 항복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몰래 감추며 촬영을 했으나 결과는 또 다른 것을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미 있는 그 무엇을 즉석으로 촬영 할 수 없었다.

그 주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말하자면, 단지 그들은 어렵지 않게 허울뿐인 괴물과 함께 살고 있다거나, 무관심, 현실 부정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한다. 어쨌든, 실제로 우리 각자에게 일어날 수도 있고 특별히 그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 날 수도 있는 핵의 위험에 대한 공공의 힘의 무관심에, 이러한 고의로 흐릿하게 한 이미지들로, 입증할 수 없음을 인간의 무관심에 답한다. 이러한 무관심은 그들에게 해결하거나 그것이 확산 될 수도 있다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별개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위협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앙심을 품은 신은 위협하거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익을 위해 일어나게 하도록 유혹하는 하나의 위협이다. 어쨌든 규칙은 간단하다. 만약 우리가 두려움에 의해 숨 막히지 않고 살아가길 원한다면, 그에 맞서 아무것도 유혹하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

우리는 여기서 예를 들면 고대 로마의 상태와 기독교 사이의 힘의 구조 안에서 믿음의 도식의 점진적인 변화와 새로운 신의 우위, 그리고 이전의 신의 우위의“융합”의 순간의 역사에서 아주 유명한 형상을 발견한다. 이 새로운 신은 예전의 신들에 의해 제정된 그것과 매우 닮은 규칙에 대한 규율을 부과한다. 이러한 규칙들은 그 다음부터는 이집트 파라오 안의 움직이지 않는 신들, 위대한 예배 행렬일 들을 제외한, 그의 신상 봉안소 안에 비밀로 유지되는 것처럼, 복잡한 신의 현현인 동신에 확인된 새로운 신에게 적용이 된다. 우리에게, 신은 전기의 형상아래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역시 그의 몸에 있는, 그의 신전 안에서 절대로 나가지 않는다. 신의 발현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매 순간 일어난다. 신상 봉안소 안으로부터의 후퇴는 파괴성을 가진다.

이미지의 금지는 새로운 차원으로 접근한다. 신은 감춰진 동신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흉측한 진실 안에서가 아닌 본질은 위험하지 않고 기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비한 본질로서, 미스터리는 이미지의 이러한 모호성으로 인해 교차된다. 사실 이미지의 금지는 이미지들의 생산의 한정된 허가를 통해 지나간다. 몇몇은 그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이 모든 미장센은 오재우의 가혹한 방법의 비디오와 함께 그들만의 신의 현현에 대한 통제의 프로그램처럼 그의 불가시성을 보여준다.

오재우_opticon_HD video_12min56_2016

좋은 소식에서 나쁜 소식을 듣는다.

이미지의 금지는 하나의 신화이거나 하나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이미지들의 새로운 현실에 적용하면서 생생하게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 오늘날, 이 역할은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만큼이 아니라 그것들이 보여주는 만큼 숨는 것이다.

이 안에서 그것은 인식의 불가항력 측면들의 하나를 구성한다. 그것은 가시성을 진실과 행위에 대한 실을 연결하면서 손을 댈 수 있는 것이 가능 해야만 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불가시성은 오래된 소재처럼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통제된 모호성 안에서 그 박탈의 새로운 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계속하기 위해 보존 해야만 한다.

서평주는 새로운 신을 텍스트의 그의 사회적 지위에 되 받아 던지는데 다시 말해 이것은 허구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서문의 “태초에 말씀하시길….” 라는 우레와 같은 소리를 기억한다. 이 아티스트는 어떠한 좋은 소식을 우리와 나누길 시도 할까? 그는 다른 아티스트들처럼 우리에게 어떤 전조 징조를 나누게 할까?

이 전조 징조에서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정녀는 없다. 구름 위를 걷는 천사들도 없고 새롭게 하는 향기의 백합도 없으며 만지지 않고 스며들 수도 있을만한 잘록한 여성의 몸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처럼, 끔찍한 생각들을 통한 확산에 대항하기 위한 뇌 안에 피의 몰림으로 인해 막힌 귀들이 온갖 곳에 있다. 다시 말해, 카멜레온의 모호성에 멀어 버린 눈들의 끔찍한 나쁜 소식이다. 즉, 필요한 소재는 바로 몸, 목소리 그리고 메시지이다.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변화는 매우 미세 해서 만약 우리가 그것을 원한다면2천년 전에 일어 났던 몇몇 의상의 변화, 소리들이나 기술들 위에 일치 시킬 수 있다.

하나의 징조가 사실로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전조 징조의 특성을 가지게 될 것인가?

서평주는 사실 선한 선의 괴물 같은 신의 현현을 다루면서 허구를 투사하는 텍스트들의 덮개 위에 펼쳐 놓았다. 그는 신 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을 택하지 않았다. 아무도 조심하는 것이 준비되지 않은 그것 들에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될 수 있을까? 그는 만약 신이 정당함과 공격성의 발현을, 혹은 제어된 뜨거움과 뜨거움의 폭발을 잘못 알고 왔었다면, 그는 바로 우리 자신인 신도들을 위해 어떠한 일이 일어 났었는지 에 대한 텍스트를 펼친다.

이러한 허구의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헌신적인 성직자가 치우는 것을 잃어 버렸을지 모르는 우라늄이 풍부한 바나나 껍질에 밀려 신이 미끄러졌을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은, 이 성직자는 종종 정상, G7혹은 G8 아니면G20 이라고 불리는 연회를 연다. 그리고 그는 잠시 머물고 난 후 그가 맡고 있는 마을들의 길들을 청소하는 것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 결과 낯선 길을 산책하길 좋아하는 신이 넘어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서평주는 핵 발전소의 폭발이 일어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시나리오를 발명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신의 후한 인심으로 보내진 메시지들의 그럴듯한 도식을 설치하면서 예언하는 것을 시도한다. 이 메시지를 받는 이들은 자신들이 바로 인질과 신의 분오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 허구의 이야기는 일어날 법한 현실로 느껴진다. 이 복음서의 말씀은 체험한 현실이 된다. 분명, 이러한 현실은 여기서 허구의 이야기 텍스트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언제나 신이 우리 몸에 공기를 넣었다는 선지자적 힘에 의해 지탱되었다.

고리의 버클은 이미 채워졌다! 부재하는 신은 모든 이 들에게 표면화 된다. 파괴자가 되어버린 폭발로부터 도망가도록 하기 위해 성직자의 목소리가 곳곳에 울려 퍼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대한 문제를 고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이 특권을 즐기는데, 일반화된 기후를 만든 도시의 소 생활권의 이익을 누리는데, 에스칼레이터, 하늘의 문 앞에 서는 엘리베이터의 이익을 즐기는 것을 계속하길 원했다. 공기가 완전히 모두 오염되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걸러지지 않은 자연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집에서는 도저히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해, 공기는 매우 뜨거워져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쾌적한 온도로 유지된 우리의 아파트의 한 구석에서, 우리가 새로운 숨겨진 신에게 보내는 정신분열증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아채는, 위험으로부터 보호 받는 것을 느끼는 짐승들처럼, 우리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것은 바로 함께 공유 할 수 있는 종말들에 대해 다섯 명의 아티스트들이 표현하는 것을 시도 했던 바로 그 메시지들 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살아있는지 정말로 알기를 원하는가? 죽음에 직면하지 않은 감춰진 신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비밀 이어야 하고 그의 신비에 대해 알아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다섯 명의 아티스트들이 그것을 하길 시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누가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가? 누가 그것들을 듣길 원하겠는가?

서평주_VR. AR_현수막_. Video_가변설치. 20min_2016

Annonciation !
Note sur le dieu nucléaire, un nouveau dieu toujours caché et sur les bonnes nouvelles qu’il propage.

I Enjeux théologiques
Dieu nouveau mais dieu caché
Bien sûr on en parle. Bien sur certains s’y intéressent. Bien sûr existe en chacun de nous une sorte de conscience diffuse du danger que représentent ces monstres silencieux et impassibles. Et pourtant nul n’ose y penser. Par peur? Non. plutôt parce que l’esprit humain est ainsi fait qu’il ne peut pas se forcer à prendre en compte un danger s’il n’est pas une menace directe.
Centrales ou bombes, aide énergétique à la construction ou puissance concentrée en vue de la destruction, tout ce qui relève du nucléaire est d’entrée marqué au front du sceau du secret. Effet réels ou effets supposés, connaissances acquises ou effets probables mais aux conséquences incalculables, tout ce qui concerne le nucléaire relève de la catégorie socio-religieuse du tabou qui est liée aujourd’hui à la catégorie mafieuse de l’omerta.
En tout cas, qui participe d’une manière de près ou de loin à une activité liée au nucléaire fait vœux de silence. Ou alors de soumission aux ordres venus d’en haut. Car lorsqu’il s’agit d’en parler, il n’est possible que de mentir. Toutes les figures de rhétorique ici sont acceptées et se mélangent avec joie dans les prêches des clergés affidés. Notre ciel est ainsi rempli de nuages vrais ou faux, toxiques ou bienvenus.
Nous avons affaire à un ordre qui, s’il n’est pas directement religieux, est donc bordé et hanté par des figures théologiques. Ce sont même elles qui le déterminent. Mais sur ce point aussi l’omerta règne ou au moins un silence contrit. Père ou mère supérieurs, autrement nommés hommes politiques et marchands de bonheur par imprégnation de terreur à doses variables, ils font régner l’ordre.
Retiré dans le secret mêlé de données incompréhensibles à ceux qui ne sont pas initiés au mystères de la physique et des mathématiques, un dieu invisible, intouchable, inaccessible, un vrai dieu donc, se tient quelque part et partout à la fois aussi immatériel qu’il sied à un dieu, aussi dangereux et vindicatif qu’il sied à un dieu, aussi bon et pourvoyeur de plaisirs ou de possibilités de décompression face à l’angoisse qu’il sied à un dieu. Les plaisirs sont devenus des éléments à vocation universelle, climatisation, communication généralisée de données factuelles, d’images vibratiles et de sons surérogatoires. Le plaisir est soumis à un règle à laquelle personne ne peut échapper, preuve s’il en fallait encore une qu’un dieu régit cet ordonnancement aux allures de chaos originel : l’alimentation générale et pour les appareils mobiles, la recharge des batteries.
Énergie discontinue mais à la constance avérée, le courant permet de prendre la mesure des gains en unité de plaisir. Sans lui, rien. De là à dire qu’il « est » dieu, il y a saut sémantique et quantique que peu s’autorisent à faire. Cela importe peu. Lui sait qu’il règne et s’amuse de voir ses fidèles jouer l’arrogance quand il lui est possible d’interrompre la production à n’importe quel moment. Personne pourtant n’y a d’intérêt. Ainsi fait-on tout pour prolonger la vie de bâtiments anciens, demeures en attente de classement au patrimoine mondial.
Et puis la peur revient pointer son nez. Mais rien n’y fait. Les gâteries sont si nombreuses et si bien renouvelées que l’on se presse pour essayer et essayer encore et ainsi continuer de se convaincre que l’oiseau de mauvaise augure n’est qu’un pantin animé par des voix malignes que la toux bientôt va enrayer. Le diable n’est pas celui qui se cache, mais bien celui qu’on voit. Le dieu, le vrai, lui, reste encore et toujours caché!

Exp(l)oser l’invisible
Invisible, l’énergie nucléaire l’est deux fois : comme ensemble de données scientifiques, sociologiques ou factuelles et en tant que telle parce qu’elle ne laisse, dit-on, aucun trace visible de son passage. Mis à part, les grand totems oraculaires des pylônes électriques, croix de fer posées par monts et par vaux à travers la planète entière, relais essentiels de sa présence non localisable et qui laissent entendre le grésillement certes en une langue incompréhensible, de sa voix, et les bâtiments surprotégés où elle est produite, on ne voit rien d’elle.
C’est bien évidemment son visage soft qui est évoqué ici, celui du dieu bon, généreux, attentif au bonheur des humains.
Et il y a l’autre visage, le visage monstrueux. On ne le voit guère, sinon sur des images d’archives savamment triées. Cet autre visage est celui de la destruction, une destruction d’une violence incommensurable et par sa puissance, et par ses effets, et par ses conséquences. Ce visage appartient au même dieu.
Tout le monde le sait mais qui peut le croire ?
Alors, comme dans toutes les religions, les hommes inventent des stratagèmes qui leur permettent de dissocier ces deux visages, ces deux aspects de l’usage possible de l’énergie nucléaire et de croire que la double nature de leur dieu serait un mystère finalement supra rationnel ne devant pas permettre de justifier le refus de la nature première et bonne au nom des dangers potentiels que recèle sa seconde nature. Laquelle est humaine et laquelle divine au sens de l’ancienne religion du dieux colérique et invisible sinon comme buisson ardent, personne ne s’aventure à le dire ?
Et puis, il y a eu ces moments où le dieu bon a révélé de manière indiscutable qu’il était bien le même que le dieu violent et monstrueux. Le cœur radieux assurant la thermorégulation des vies humaines est devenu un cœur explosif et dangereux. En fait dans l’histoire réelle de son invention c’est l’inverse qui se produit. On commence par construire l’appareil destructeur avant de le recouvrir du voile des appareils de plaisirs. Le dieu promoteur de la douceur climatique s’est d’abord manifesté à travers une explosion d’énergie inconsidérée. Mais ensuite, sinon par les stigmates dont certaines de ses créatures ont été maquées, il est resté comme toujours invisible.
Qui alors pour poser ces question puisque aucun des serviteurs du dieu ne peut le faire?
Parmi ceux que la société appelle artistes, certains, loin de se contenter de se servir de pinceaux et de reconduire le dieu ancien dans son mystère pourtant éventé depuis quelques décennies, s’emparent des questions relatives au dieu actuel et montrent en quoi précisément elles sont théologiques.

II Variations herméneutiques
Le grand tout

Dans une exposition s’inscrivant dans un cycle long de réflexion sur la peur et les peurs aujourd’hui, le lieu d’art Gong a proposé sous le titre Göri, nom du lieu où se trouve la centrale nucléaire la plus proche de Busan, une exposition dans laquelle avec pertinence cinq artistes ont déployé certains aspects de la dimension théologique du nucléaire.
Dans une fresque immense, Sung Yu-Jin a entrelacé images issues des grandes tombes de l’Égypte pharaonique et éléments visuels issus du monde actuel. Dans une forêt luxuriante mais envahissante, elle a levé un coin voile sur le mystère du mystère, l’enchâssement de notre croyance en notre immunité face aux dangers que recèle le visage monstrueux du nucléaire. Nout, la grande déesse du ciel enveloppe de son corps étiré le monde que les hommes inventent. Cryptés, des signes et des figures évoquent l’idée que des énergies dépassant les normes humaines ont déjà pu être connues et utilisées à des époques antérieures. La forêt dessinée et qui représente le monde extérieur à celui de la fresque exprimant à travers le corps de Nout notre croyance en un tout accueillant et protecteur, cette forêt pose une question théologique d’importance.
Comment un tout peut-il être sans bords et donc sans extériorité? Et s’il y a une extériorité un dehors, que s’y passe-t-il ? N’est-ce pas là que se cachent, tapies dans l’ombre d’une forêt impénétrable, les forces de la destruction ? Car ces forces sont inscrites dans un temps qui dépasse celui de la patience humaine. N’avons nous pas nous aussi déjà fait l’expérience de ce dieu-là? Il se pourrait bien que nous soyons déjà morts une fois. Alors, on comprend que ces forces de destructions peuvent attendre l’éternité plus un jour s’il le faut pour pouvoir reprendre le contrôle de ce petit monde qui se croit indemne et protégé de toute agression mortelle.

Prolifération
Yeo sang-Hee avec son terrain rempli de petits champignons qui ressemblent à la fois à de vrais champignons et en même temps à des champignons atomiques, forme la plus connue par laquelle le dieu vindicatif et monstrueux s’est manifesté à ce jour, met en scène avec humour des enjeux extrêmement sérieux. La forme du champignon est assez agréable à l’œil et rien en elle ne vient indiquer qu’elle est l’une des manifestations du monstrueux. Le dieu colérique et méchant sous la forme d’un champignon, cela relève de la plaisanterie ! Et puis, il y a la prolifération de ces champignons, forme habituelle par laquelle en tant qu’espèce végétale ils croissent et se développent. Là, c’est un autre aspect du dieu nucléaire contemporain qui est révélé. En effet, un dieu a, en particulier dans les religions du livre, mais dans la plupart des autres aussi, pour fonction principale d’assurer le bien être de ses fidèles. Et pour ce faire il doit proliférer et il le fait à travers les légions de ses serviteurs plus ou moins efficaces ou zélés que sont par exemple les anges, mais aussi ses « ministres » du culte ou tout simplement ceux qui croient en lui et déploient sa parole ou son message.
Que se passe-t-il si la prolifération n’est plus sonore et visuelle mais concrète et envahissante dans l’espace réel? La métaphore du champignon fonctionne ici à merveille pour dire le décalage entre une vision immune de la religion et une vision destructrice par surcroit de puissance et application incontrôlée de la loi de la prolifération.

Frontières perceptuelles
Song Ho-Jun aborde avec humour et distance l’une des questions les plus difficiles que nous pose le nouveau dieu. En effet, il est invisible et en fait il faudrait dire qu’il est imperceptible, c’est-à-dire que ses manifestations les plus efficaces se produisent dans des strates de réalité que le sens humains ne peuvent pas percevoir.
Ce dieu nucléaire est tout simplement au-delà des sens. Mais cela ne veut pourtant pas dire qu’il serait sans effet sur les corps et les psychismes des fidèles et des peuples qui, avec ou sans foi, vivent dans son orbe.
À travers l’image du grand physicien Einstein dont les facéties bien connues amusent encore aujourd’hui et en particulier sa manière de tirer la langue pour dire à tous et à chacun combien il ne faut pas prendre la vie trop au sérieux, c’est la question de la perception humaine et de ses limites qui est posée. En effet, si nous approchons d’un petit appareil à côté de l’image nous ne percevrons pas l’apparition quasi subliminale de la langue tirée sur le petit écran qui se trouve à côté.
De la même manière, nous ne saisirons bien ce que dit la voix, quelque chose comme « you will die » qu’en nous approchant de la pierre d’uranium accrochée à un joli collier auprès d’un compteur Geiger mesurant l’intensité des radiations émises par la pierre. Cette mise en scène attire notre attention sur le caractère très concret de l’invisibilité de ce dieu nucléaire et sur sa puissance de contamination invisible, c’est-à-dire imperceptible par le sens.
On le comprend, nous avons pénétré dans des zones de la matière et de la compréhension du monde qui en transforment totalement la « réalité ». Nous avons en quelque sorte inventé un nouveau continent composé de toutes les strates de l’imperceptible que seuls des appareils techniques très sophistiqués peuvent permettre de traduire dans ces langages perceptibles par les sens que nous connaissons bien, le son et l’image. Mais les effets les plus puissants et les plus radicaux de la puissance de destruction potentielle d’une centrale restent, sauf en cas d’accident ou d’acte de guerre, non perçus. Ce n’est plus l’imperceptible qui compte ici, mais le fait que le danger n’est pas pris en compte. Il n’est évoqué, comme une réalité possible, que sous la forme d’un mauvais rêve qu’il est possible d’oublier dès que nous reprenons conscience des effets bénéfiques de l’atome devenu électricité.
À ceci près que ce rêve peut à chaque instant devenir réalité et que nous sommes donc embarqués dans une opération psychique complexe inscrite dans la longue durée, de déni, de mensonge et d’aveuglement.
Le dieu invisible se révèle invisible parce que, en nous, la vue comme la vision sont liés à notre psychisme et qu’il est régulé par nos angoisses. L’invisibilité de ce dieu-là est donc concrète parce qu’on ne voit pas les radiations. On de contente de les mesurer et cela suffit à nous rassurer, car les chiffres ne signifient rien et les mots qui le traduisent apportent tous plus de bonnes nouvelles que de mauvaises. De plus, notre fonctionnement psychique fait que nous préférons ne pas voir plutôt que d’être confrontés à l’horreur et au monstrueux dont nous sommes les inventeurs et les insatiables promoteurs.

L’interdit des images
Oh Jaewoo s’est quant à lui saisi de la question du dieu invisible à partir de ses manifestations iconiques. Nous retrouvons ici les vieilles antiennes qui entourent de leur halo verbal les images en tentant d’imposer un chant contraire à ce qui est rendu manifeste.
L’interdiction de visiter et de photographier les sites de production d’énergie nucléaire et en particulier celui de la centrale de Göri qui se trouve à proximité de Busan, seconde ville de Corée fait l’objet de cette vidéo exemplaire. En effet aucun texte ne vient interférer avec les images seule une bande son de l’artiste Jeon Youjin rend cet espace non visible plus mystérieux encore.
Oh Jaewoo explore et rend perceptible à chacun un aspect essentiel du mystère qui entoure ce dieu. La langue des images peut être dite « universelle », mais ce n’est pas ce qui importe. En partant des vues du site disponibles sur le web, il constate qu’il est aisément possible de rendre une image muette ou si l’on veut insignifiante. Il suffit pour cela soit de la flouter, soit de la remplacer par des images tronquées les images qu’il serait possible de voir si l’état ne trichait pas. En effet, sur le site de Göri, il n’est pas possible de zoomer avec la même résolution qu’ailleurs.
Comment cela est-il possible et légal? L’état qui possède et contrôle à la fois le nucléaire et les réseaux ne se pose pas ces questions. Plus haute instance du clergé de ce dieu si puissant, l’État, sur ce point, peut tout et ne s’encombre pas de questions relatives à la légalité de ses actes.
Par un travail efficace, Ho Jaewoo nous donne donc à voir l’impossibilité de voir, et même l’interdiction de voir. Certaines séquences montrent qu’il s’est rendu sur les lieux, a filmé en cachette, mais le résultat ne permet guère autre chose que de monter qu’on ne pouvait pas filmer sur place quelque chose qui soit significatif.
Quant aux gens qui vivent autour, on constate simplement qu’ils cohabitent avec le monstre sans difficulté apparente, soit par ignorance soit par déni. En tout cas, et ces images floutées ou impossibles le prouvent, à l’indifférence des pouvoirs publics face au danger que le nucléaire fait réellement courir à chacun, et en particulier à ceux qui vivent près des sites, répond l’indifférence des hommes, une indifférence d’un autre genre puisqu’il s’agit pour eux de réguler ou d’empêcher le stress qui les éteindrait s’ils devaient vivre en pensant en permanence à la menace qui pèse directement sur eux.
Le dieu vindicatif menace ou plus exactement il est une menace qui tente de se faire passer pour un bienfait. En tout cas la règle est simple. Si l’on veut pouvoir vivre sans être étouffé par la crainte, il faut ne rien tenter contre lui.
On retrouve ici une figure bien connue dans l’histoire par exemple au moment de la « fusion » entre état romain et christianisme, celle du glissement d’un schéma de croyance et de domination d’un nouveau dieu dans la structure de pouvoir et de domination d’un dieu ancien. Ce dieu nouveau a imposé des règles qui s’appuient sur des règles qui ressemblent de très près à celles qu’avaient édictées les anciens dieux, à ceci près qu’elles s’appliquent désormais à un dieu nouveau dont les incarnations multiples sont à la fois avérées et donc visibles et en même temps tenues au secret, comme était tenues au secret dans son naos, sauf les jours de grande procession, les statues des dieux dans l’Égypte pharaonique. Pour nous, le dieu est présent chaque jour dans notre vie sous la forme de l’électricité, mais il ne sort jamais de son temple, qui est aussi son corps. La procession du dieu a lieu à chaque instant de notre vie quotidienne. Son retrait dans le naos est sans faille.
L’interdit de l’image accède à une nouvelle dimension. Le dieu est à la fois caché et visible, mais pas comme entité dangereuse, et perceptible non dans sa vérité monstrueuse, mais comme entité mystérieuse, le mystère étant relayé par cette ambiguïté des images le concernant. En fait l’interdit de l’image passe par une autorisation limitée de production d’images, certaines confirmant son existence, toutes mettant en scène, comme le montre avec rigueur cette vidéo de Oh Jaewoo, son invisibilité comme un programme de contrôle sur ses propres manifestations.

Entendre la mauvaise nouvelle dans la bonne nouvelle
L’interdit de l’image est un mythe ou un récit dont il convient de maintenir vivant les fondements en les adaptant à la réalité nouvelle des images dont la fonction est, aujourd’hui, de cacher cela même qu’elles montrent sans pour autant pouvoir le montrer.
Dans ce pli, qui est aussi celui dont on dit qu’il constitue l’un des aspects majeurs de la conscience, il devrait être possible de mettre la main sur quelques fils reliant le visible à la vérité et la vérité à des actions. Il n’en est rien. L’invisibilité est acceptée comme une donnée ancienne qu’il faut préserver pour continuer à assurer la sécurité du nouveau dieu, celle de son retrait dans un flou contrôlé par l’état.
Seo Pyoung-Joo, lui, renvoie le nouveau dieu à son statut d’être textuel, c’est-à-dire d’être fictionnel. On se souvient du tonitruant, « Au commencement était le verbe… » du prologue de l’évangile de Jean. Quelle bonne nouvelle cet artiste essaye-t-il de nous faire partager ? Quelle annonciation est-il, à l’instar des autres artistes en mesure de nous faire partager ?
Dans cette annonciation, il n’y a pas de vierge attentive à la parole, pas d’ange marchant sur un tapis nuageux et léger, pas de lys à l’odeur décapante ni de corps féminin en retrait pour l’absorber sans avoir l’air d’y toucher. Mais, comme nous venons de le voir, il y a partout des oreilles bouchées par l’afflux du sang dans le cerveau pour lutter contre son envahissement par de terriblement mauvaises idées, c’est-à-dire de terribles mauvaises nouvelles, des yeux aveuglés par des images à l’ambiguïté de caméléon. Bref, le matériel nécessaire est là, un corps, une voix, un message. La structure n’a pas changé. Les variations sont infimes si l’on veut bien s’accorder sur les quelques changements vestimentaires, sonores ou techniques qui ont lieu depuis deux-mille ans.
Une annonce va pourvoir être faite. Aura-t-elle a le caractère d’une annonciation?
Seo Pyoung-Joo en effet a déployé sur des bâches des textes sur lequels il projette une fiction traitant de l’une des manifestations monstrueuses du dieu bon. Il n’a pas choisi de parler du dieu lui-même. Qui le pourrait sinon les spécialistes auxquels personne ne prête attention? Il déroule le texte de ce qui se passerait pour les croyants que nous sommes, si le dieu venait à confondre bonté et agressivité, ou chaleur contrôlée et explosion de chaleur.
On pourrait dire aussi que le dieu aurait, dans cette fiction, dérapé sur une peau de banane poussée à l’uranium enrichi que son clergé zélé aurait oublié de ramasser. En effet, souvent, ce clergé fait des agapes qu’il nomme le plus souvent sommet, ou bien G7 ou encore G8 ou encore G20. Et il oublie de nettoyer après son passage les rues des villes qu’il occupe. Et le dieu qui aime à se balader incognito risque en effet de chuter.
Alors Seo Pyoung-Joo a choisi d’inventer un scénario de ce qui se passerait dans le cas de l’explosion d’une centrale. Il tente de prophétiser en établissant un schéma plausible des messages qui seraient alors envoyés à ceux qui de bénéficiaires des largesses du dieu se retrouveraient être devenus les otages et les victimes de sa fureur.
Ici, la fiction s’éprouve comme réalité possible, le verbe de l’évangile devient réalité vécue. Certes, cette réalité a encore ici la forme d’un texte, d’un récit fictif donc, mais ce récit, lui, est porté par la puissance prophétique que le dieu nous insuffle depuis toujours.
La boucle est bouclée ! Le dieu absent se manifeste à tous, la voix de son clergé retentit partout pour nous dire ce qu’il faut faire pour échapper à la fureur devenue destructrice.
Mais nous n’en avons cure ! Nous voulons continuer à jouir de nos privilèges, à profiter de biotope urbain fait de climatisation généralisée et d’escaliers roulants, d’ascenseurs qui s’arrêtent à la porte du ciel et de fraicheur revivifiante dans un air devenu si caniculaire qu’on n’ose parfois plus sortir de chez soi pour respirer l’air naturel devenu irrespirable depuis longtemps s’il n’est pas non filtré, parce qu’il est en fait totalement pollué.
Et nous nous replions sur nous-mêmes, dans le coin de notre appartement climatisé, vivant comme des bêtes qui se sentent protégées et hors de danger mais qui perçoivent malgré tout le message schizophrénique que nous envoie le nouveau dieu caché. C’est ce message que ces artistes on tenté de formuler en des termes partageables.
Mais voulons vraiment savoir ce que nous sommes en train de vivre? Nul ne regarde le dieu caché en face sans en mourir. Nous savons qu’il nous faut être discret et ne pas chercher à percer son mystère. Malgré tout ces cinq artiste ont tenté de le faire. Qui va les écouter? Qui va les entendre?

TK-21 LARevue 편집장 Jean-Louis Poitev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