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을 위한 질병관리본부

지구인을 위한 질병관리본부
(Earthian Center for Disease Control & Prevention)
2020.7.17-8.15

고의선 김찬우 노경화 박철호
살친구(양승욱+허호) 손소현 손재린
송유경 신세빈 유한솔 이신아
임승균 임지혜 홍근영

주최:인디아트홀 공
기획:임정서
코디네이터:유지영
자문:이은정,하진
필진:나일민,이인복
프로듀서:조병희 / 디자인:임훈
행정:오원석 / 설치:김양선
사진:안돌용
전시진행:박준식,안지형, 여연재,이해현,최우창
협력:웍밴드공,생체실험실,9blocks,DoPlus,칼날
후원 : 서울문화재단
 

인간은 질병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이인복 (디스쿼터/웍밴드)

스마트폰을 쥐고 매일 마다 뉴스를 확인했다. 소통의 매체는 우리에게 세계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난폭한 나머지 나의 위기의식은 더 자극되었다. 이런 상황에 적응하는 일이 가능할까. 가면이 완전히 벗겨졌다. 속보로 뜨는 확진자의 숫자에 인간의 품위, 예절, 관용은 사회에서 격리조치 되었다. 차별, 폭력, 혐오가 난무했다. 부풀려진 위험성, 바늘 구멍으로 세상을 보는 것, 집단적 광기. 점잖은 척 하던 사회가 요동쳤다. 바이러스가 발생했고 퍼져나갔다. 동시 다발적으로 도덕성의 붕괴가 발생했고, 광기가 퍼져나갔다.

얼마나 합이 잘 맞는 짝인가. 도덕성과 질병. 일반적으로 그것은 손을 함께 잡고 걷지만 서로 시선을 회피한 채 다른 방향을 본다. 도박꾼들처럼 질병은 짐짓 아닌 척, 정직한 척, 가장 그럴듯한 거짓패들을 골라 총천연색의 희망을 집어넣으며, 도덕성이란 패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지만 결정적 순간에 패를 바꿔치기 해서 판 밖으로 던져버린다. 완벽한 사기 도박판이다. 카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오링시의 하수구에서 기어 나와 피를 토하면 거리에 널부러진 건 쥐의 사체였다. 지금 세계의 하수구에서 기어 나와 피를 토하고 있는건 대체 무엇인가?

코로나로 인해 우리 사회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가장 심각한 도덕적, 정신적 위기에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물질 만능주의, 기술 맹신주의 사회는 가야할 곳을 완벽히 잃었다. 고작해야 위기의식을 부풀리고 숫자에 매달린 채 도처에 존재하는 폭력에 대한 결정을 미룰 뿐이다. 인본주의는 죽었고 신도 인간도 보이지 않는다. 올해 초 코로나가 중국에서 유행했을 때 등장했던 가장 어리석은 주장 중 하나는 “중국인을 입국 금지 시켜야 한다.”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보수정당과 신문이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주장 중에서 가장 멍청하고 이기적인 전략이었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길거리 폭력에 노출된 건 오직 중국인만이 아닌 아시아인이었으니 말이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한 나머지 사회의 가장 기본적 가치인 ‘인간 존엄’을 배제 했는데 결국 자신의 존엄마저 배제당한 꼬락서니다.

임지혜_코로나19 신문 콜라주 (일부)_2020
지난 수세기에 걸친 인간 역사의 당연한 진실을 폐기해야 한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말 만큼이나 거짓된 명제는 없다. 인간의 역사는 현재의 우리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우리에게 비극적인 역사의 순간을 재생산하는 길을 친절하게 제시한다. 페스트, 천연두, 장티푸스, 스페인독감, 에볼라, 코로나까지. 단지 그 시절의 물리적 폭력의 도구가 좀 더 스마트하게 바뀌었을 뿐이다. 장작더미에 매달아 불태우던 마녀가, 소록도에 격리된 나병환자가, 무릎 꿇고 도심 내 특수학교 설립을 빌던 학부모가, 코로나로 격리된 환자가, 되살아난 인종차별에 무차별 폭행당한 한국인이. 반복되는 질병의 역사에서 비인간적 방식으로 공격당했다. 대체 수세기동안 무엇이 치료되었고, 무엇이 살아남았는가?
임승균_Test808_2020
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나도 안다. 우선은 살아야 한다. 코로나에 승리해야하고 생존을 위협하는 질병을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먼 미래의 결과보다 현재의 과정과 절차에 대해 우리는 의식해야 한다. 질병은 이제 폭력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초기 확진자 들의 동선이 공개될 때마다 집단의 야수성이 터져 나왔다. 전염병은 특히 비전염자들에게 도덕적 책임의식을 덜어주고 자신의 수준 떨어지는 옹졸함을 감추는 데 사용되었다. 무장을 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손에 쥔 돌을 던지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 질병은 자신의 암종을 전 세계까지 퍼뜨리기에 앞서서 인간의 존엄성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것이 문제다. 인간은 날이 갈수록 스스로 질병처럼 행동한다.

질병에 대한 불안은 고통에 빠진 인간에게 빠져나올 해답이 없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합리적 해결책을 척척 찾아내는 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해결책이 없는 현재의 상황에 인간에게 내재한 실패의 고통은 과격한 차별과 폭력의 원인이기도 한다. 질병은 더 이상 인간에 대한 육체적, 생물학적, 병리학적 제약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를 구속함과 동시에 도덕성이 시험대에 오르게 한다. 우리는 항상 이 시험대의 주변부에서 관찰하고 있다고 상상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 <부산행>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 끊임없는 이기심을 보여주는 용석의 캐릭터를 보며 사람들은 ‘명존세’를 외쳤다. 1100만명의 관객이 시험대의 주변부에서 용석의 순수무잡한 이기심에 용석의 ‘명치를 존나 세게 치고 싶어’했다. 정작 코로나가 통제불능의 사태에 빠지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용석이 되어 열차칸의 문을 닫았다. 부디 질병과 그로 인한 불안을 탓하지 않기 바란다. 그것은 심리적 조건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 도덕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윤리, 양심, 관용의 요구는 소파에 앉아 티비 채널을 결정하는 순간에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극한의 비인간적상황에서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인간의 영혼과 양심을 증명한다.

혼란과 불확실성의 시대다. 시대가 엄혹할수록 우리는 항상 앞으로 살고 싶은 사회에 대해 스스로 질문했다. 하지만 역사상 이토록 인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질병의 역사에서 최후의 승리를 증명하고자 한다면 수단과 방법의 중요성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상주의자로 취급당할 위험에도 나는 이것보다 다른 것, 다른 종류의 생존법을 이 질병의 시대에 찾을 수 없다. 깊은 생채기가 남을 것이다. 당연히 불안하지만 위선을 버리고 두려움 없이 이 시대를 마주해야 한다. 결국 질병시대에서 우리를 구하는 것은 인간 정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