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점 - 이은정

이.시.점
This Point of View
이은정 (LEE EunJung) 개인전
2020.12.3-13

이. 시. 점.

나의 작업과 삶의 큰 주제는 패턴과 균형이다.

일상에서의 사적인 패턴에서 전문가들의 분석적 패턴, 자연 속에 존재하고 발견된 수많은 패턴은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다. 서로 다른 영역에서도 패턴은 보이지 않는 관계로 얽혀 존재한다.

왜 인간은 패턴을 찾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가설은 ‘균형’의 추구이다. 균형을 찾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상태를 위해 우리는 불균형의 상태 위에서 패턴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균형을 꿈꾼다. 내가 속한 사회와 자연 사이에는 어떤 관계와 패턴들이 숨어있을까? 인간의 작고 소소한 일부가 자연의 형태를 닮아있는 이미지는 오랜 관심사다. 손가락 지문이 우리가 사는 은하의 나선 모양을 닮은 것처럼 작은 발견은 호기심이 되고 호기심은 작업의 원동력이 된다.

우리의 반복적인 일상은 코로나 19로 인해 더 단순해졌다. 이동 범위와 횟수가 줄어들면서 최소한의 움직임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일주일에 4일 이상을 ‘집- 작업실- 편의점 또는 마트- 집’으로 이동하며 단순한 생활패턴으로 살고 있다. 주변의 지인들 또한 비슷한 일상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펜데믹은 생활 패턴뿐 아니라 각자의 이유로 우연히 특정한 장소에 머무는 것 자체가 새로운 집단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보여주었다. 나와 관계없던 스쳐 지나가던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 있는 사실 자체가 보이지 않은 관계를 만드는 불편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문제는 불특정 공간에 있는 타인을 관찰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타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이 아닌 서로를 의심하는 눈길을 마주하게 된다. 이 시점, 나는 우연히 마주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 보이지 않는 관계 속에서 새로운 패턴을 찾고 있다.
143번 입니다_acrylic on canvas_33X45.5cm_2020
공무원의 만찬_oil on canvas_91X72.5cm_2020
최후의 만찬_oil on canvas_91X72.5cm_2020
예술가의 만찬_oil on canvas_91X72.5cm_2020
정릉3동_oil on canvas_50X64.7cm_2020
고수부지_acrylic on canvas_53X45.8cm_2020

작품 목록

얽히고설킨 이. 시. 점.

글; 배우리

이은정 개인전 〈이.시.점〉의 마지막 날, 2020년 12월 13일 일요일 현재 상황
하도 왔다 갔다 해서 지금 몇 단계인지 모르겠다.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가 될 것 같았는데 2.5단계도 효과가 없는 마당에 3단계는 효과가 있겠냐는 의견도 있단다. 아무튼 3단계는 안 한단다. 이런 식으로 며칠 날짜와 상황을 쓰고 나면 재난 영화 주인공의 생존일기처럼 될 것이다. 안 그래도 전시(戰時)에 준하는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무엇을 이야기하든 찰거머리 같은 그 놈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미래학자 토머스 프레이는 ‘2020’을 지나가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인류의 보수화·파편화가 가속화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도대체 그 파편화라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우리는 무리지어 만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거다. 이은정은 오히려 파편화된 개인들, 관계없는 것 같아 보였던 인간들이 같은 공간(空間 혹은 空氣)을 잠시잠깐 점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아주 강력하게 꿰어지는 이 세태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개인들의 동선, 그 보이지 않는 ‘선’에 관해 생각했다. 1인 가족, 2인 가족의 생활 동선을 조사했고, 사람들의 이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한 사람을 나타내는 점은 움직이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선이 된다. 그렇게 화면에 그려진 일상 공간 위로 떠오른 ‘선’은 그가 천착해온 관계와 패턴을 다시금 불러내었다.

출근길 지하철 상황; 집단 최면 혹은 면역
탑승 전 교통카드를 찍으면 삑 소리와 함께 “마스크를 착용해주세요”라고 안내인지, 명령인지 모를 말이 나온다.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도 마스크를 쓰라고 친히 알려주고, 지하철에 탑승해서도 대화나 통화를 자제해달라고 한다. “하이패스는 빠르고 편리합니다”만큼이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소름끼치는 안내다. 이런 안내가 어떻게 사용될지는 조금 더 두고 보면 알 일이겠지만, 아무튼 위기를 앞세우면 통제사회가 되기 너무 쉽다. 이은정 작가는 ‘2미터 거리두기’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한다. 출퇴근 지하철 안만 해도 그야말로 밀접 접촉 대잔치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2미터는 도대체 누구네 댕댕이 이름이란 말인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집단면역을 실험 중이다. 아무리 ‘양팔 벌려’를 해도, 내가 점유했던 공기를 누군가는 또 마시게 될 것이다. 그래서 출퇴근이 문제냐. 그건 또 아니다. 지하철에서는 감염사례가 없다고 광고까지 한다. 2미터는 어림도 없는 소리지만 어찌저찌 모든 일들은 굴러가는 중이다. 사람들은 건물 밖에서 더 몰리기도 한다. “이상해. 나는 모든 게 지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앞뒤가 맞는 게 하나도 없어.” 작가 말마따나 2미터는 허구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언제나 겹치고, 부딪치기를 반복하니까.

음식물 섭취 상황; 우리의 원죄
식사는 사회적 활동의 일환이다. 그래서 사회적 활동이 결여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끼니를 때우’게 되는 것이다. 만날 사람도 풍족한 음식도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놈은 모여서 함께 먹는 것도 못하게 한다. 모이더라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고, 모두 정면을 응시해야 한다. 침 튀면 안 되니까. 그러고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무슨 주말드라마 장면도 아니고 화면으로부터 뒤돌아 있는 인간이 하나 없이 모두 앞을 바라보고 있다. 회화는 그 때 당시 드라마니까 그렇다 쳐도 500년도 더 전에 이런 구도를 했다는 것도 신기하고 새삼 이 작품을 꺼내온 작가도 웃기다. 작가는 공무원의 만찬과 오랜만에 만난 예술가 친구들과의 만찬 장면을 〈최후의 만찬〉 양 옆에 걸어 〈최후의 만찬〉 ‘점’ 버전 3부작을 선보였다. 최후의 만찬 이후 비극이 일어났지, 암. 그 때는 한 사람만 제물로 삼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제물이 될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원죄가 있다고 하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이야기는 이 시점에서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모든 사태의 시작이라고 할 만한 것이 먹는 것에 들러붙은 인간의 여러 욕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진대, 이제야 우리는 원죄에 대한 책임을 다 같이 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놈이 메시아지. 어떤 차별도 안 하니까.

그림 속 상황; 아무튼 회화
아무튼 작가, 그리고 우리도 같이 상상했던 그 비등비등한 미래의 이미지는 끝났다. 사람들이 혼자서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시점이 왔다. 사진 입체 설치와 드로잉 등을 돌고 돌아 다시 회화로 돌아온 작가는 코로나시대, 회회가 최고라고 말한다. 어렵게 설치할 필요도 테크니션도 필요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회화 작업은 과거를 돌고 돌아 미래로 왔다. 작가는 영상마저 수천 장을 그린 그림을 이어 붙여 만들었다. 작가에게 작업은 일이기도 하지만 취미기도 하다. ‘taste’로써의 취미이자 그것을 수련하는 과정 말이다. 그녀는 어떤 완성된 기법이나 완성된 하나의 그림 말고, 행위로서의 회화를 즐기고 있다. 물론 회화의 수행성, 이 당연한 이야기가 자꾸 회자된다는 건 어쨌든 지금 현대문명을 구성하는 손꾸락 터치 문화가 우리를 물질에서 멀어지게 하면 할수록 작가처럼 스크린 표면 안으로 연결된 그런 선들을 감지하거나 체제를 의심하는 능력이 점점 떨어질 것이라는 어떤 불안 때문일 것이다. 그놈에게 걸려들지 않기 위한 방법이라면서 침대에서 폰만 보다 잠드는 만화가 있던데 우리는 안다. 침대에서 핸드폰만 보는 것이 가장 저급한 취미라는 걸 말이다. 알면서도 바꾸진 못하지만. 아무튼 이 시대에는 자신만의 취미, 의식(ritual)을 가진 자가 살아남을 것이다. 소비자의 취미 말고 소비를 비켜가는, 작가처럼 혼자 그림 그리는 거나 곡을 만들거나 피리 불기 같은 취미.

다시 선
선은 정말 무서운 거다. 영화 〈루시〉에서 주인공이 나무의 핏줄을 눈으로 보듯, 보이지 않는 선을 본다는 것은 이미 틀려버렸지만 파기할 수도 없는 이 시점의 모든 ‘주의(主義)’들에 대해 감시 정도는 가능하게 한다. 어쩌면(아무 기대도 않지만 언제나 낙관주의자인 척 쓰는 부사) 최근 한창 논의 중인 곰팡이까지 끌어안는 공생세(Symbiocene)* 와 전생명체(Holobiont)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될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그 짜릿한 맛에 신나 들떠있는, 그러니까 온갖 상품에 눈 팔린 손꾸락 인간은 절대로 모를, 그 무시무시한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세계로까지 나아갈 길. 이 시대에 예술가가 필요한 이유를 대보라면, 예술가는 루시의 눈, 지진을 먼저 감지하는 동물 같은 감각 같은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은정 작가도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감지하지 못하는 미세한 감각을 전해주었다. 글 마무리가 늦었다. 12월 23일. 오늘부터 5인 이상은 만날 수가 없다. 독립운동 하는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 운동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못 만난다. 주민등록 상 같은 주소지가 아니면 말이다. 그러니까 식구 다섯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혼자만 나와서 자취를 한다. 주소지가 다르다. 본인이 본가로 가면 불법적 모임이 돼버린다. 2021년에도 살아있는 것이 용한 요지경 미래는 계속될 것이다. 정말이지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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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철학자 글렌 알브레히트(Glen Albrecht)는 대량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이름, 인류세 대신 공생세라는 개념을 쓰기를 제안한다.
** 고기도 못 끊으면서 이 얘기 지껄이는 나도 난데, 아무튼 많이 줄이고 있다고 일단 방어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