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등(等等)·등(燈) - 임동현 개인전
등등(等等)·등(燈)
2022.10.25-11.26
그 밖의 것, 그 밖의 사람들의 발광(發光)
등등(等等)·등(燈)
이번 전시는 사회 중심부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규정한 ‘사람’과 ‘것들’을 비추기 위한 것이다. 등등(等等)은 그 밖의 것으로, 생산성, 효율성, 실용성 등의 기준이 쳐내 버린 언저리들이다.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한 사람들과 끼니, 버려진 물건들, 가성비라고 미화된 싸구려 물건들, 경제적 관계가 강제하여 익숙해져 버린 동작 그리고 생산 후 유통에서 배제되어 가치를 실현하지 못한 창고 속의 나의 생각과 노동 생산물들…모두 ‘등등’이다.
이 전시는 무관심의 그늘 속에 묻혀 있던 것들과 사람들을 스스로 비추기 위한 ‘등등’의 자체(自體) 발광(發光)이다.
이번 작업은 내가 투입한 노동량의 정도와 작품재료에 따라 네 가지 방식으로 이뤄졌다.
첫째, 버려진 자연물의 형태를 그대로 이용하거나 결합하여 작품으로 만들었다.
둘째, 자연물 재료로 적극적으로 가공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셋째, 저렴한 공산품들의 조합을 통해 원래 용도를 변경한 후 자연물을 결합하고 노동을 투입하여 하나의 작품을 제작했다.
넷째, 조명기(공산품)에 주로 판화, 드로잉 등 나의 작품을 결합하여 노동 생산물을 생산했다.
첫째와 넷째 방법이 재료의 원래 용도에 기초한 생산물이라면 둘째와 셋째 방식은 나의 창작으로 원래의 용도를 바꿔서 다른 생산물을 만들었다. 네 가지 방식을 관통하는 원리는 노동과 그 흔적의 집적이다. 작업은 표면을 반복해 긁은 후 구멍을 뚫어 빛이 발산하도록 했는데 표면의 긁힘 방식도 무정형의 추상적 이미지에서 구상적인 것까지 새겼다. 작품의 추상적 이미지는 등등을 향한 기원을 표현했다면 구상적 형상은 삶의 익숙한 물건과 사람들을 밝히고자 했다.
생존을 위해 나무가 벗어 버린 나무껍질, 삶의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표면의 흔적들, 상처 치유용 소주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그늘이다.
나의 노동집약적 생산과정이 그늘의 존재를 표출하고 인간다움을 위한 저항의 빛이길 바란다.
나는 작품을 통해 사소한 것, 버려진 것, 무관심, 바닥, 비관적인 것들에 대해 사회가 규정한 위치와 평가, 접근법으로 응축된 관계를 흔들고 싶었다.
소망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예술은 중심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쓸모없는 것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라는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의 말에 기대어, 나는 나의 생산물을 통해 실패의 쓰라림에 빛을 비추고 모든 주변부와 쓸모없는 것에 따스함을 전한다. 수많은 ‘등등’의 존재에 그리고 나의 노동 생산물에 존중의 등불을 들어 발광을 획책한다.
등등(等等)·등(燈)
이번 전시는 사회 중심부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규정한 ‘사람’과 ‘것들’을 비추기 위한 것이다. 등등(等等)은 그 밖의 것으로, 생산성, 효율성, 실용성 등의 기준이 쳐내 버린 언저리들이다.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한 사람들과 끼니, 버려진 물건들, 가성비라고 미화된 싸구려 물건들, 경제적 관계가 강제하여 익숙해져 버린 동작 그리고 생산 후 유통에서 배제되어 가치를 실현하지 못한 창고 속의 나의 생각과 노동 생산물들…모두 ‘등등’이다.
이 전시는 무관심의 그늘 속에 묻혀 있던 것들과 사람들을 스스로 비추기 위한 ‘등등’의 자체(自體) 발광(發光)이다.
이번 작업은 내가 투입한 노동량의 정도와 작품재료에 따라 네 가지 방식으로 이뤄졌다.
첫째, 버려진 자연물의 형태를 그대로 이용하거나 결합하여 작품으로 만들었다.
둘째, 자연물 재료로 적극적으로 가공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셋째, 저렴한 공산품들의 조합을 통해 원래 용도를 변경한 후 자연물을 결합하고 노동을 투입하여 하나의 작품을 제작했다.
넷째, 조명기(공산품)에 주로 판화, 드로잉 등 나의 작품을 결합하여 노동 생산물을 생산했다.
첫째와 넷째 방법이 재료의 원래 용도에 기초한 생산물이라면 둘째와 셋째 방식은 나의 창작으로 원래의 용도를 바꿔서 다른 생산물을 만들었다. 네 가지 방식을 관통하는 원리는 노동과 그 흔적의 집적이다. 작업은 표면을 반복해 긁은 후 구멍을 뚫어 빛이 발산하도록 했는데 표면의 긁힘 방식도 무정형의 추상적 이미지에서 구상적인 것까지 새겼다. 작품의 추상적 이미지는 등등을 향한 기원을 표현했다면 구상적 형상은 삶의 익숙한 물건과 사람들을 밝히고자 했다.
생존을 위해 나무가 벗어 버린 나무껍질, 삶의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표면의 흔적들, 상처 치유용 소주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그늘이다.
나의 노동집약적 생산과정이 그늘의 존재를 표출하고 인간다움을 위한 저항의 빛이길 바란다.
나는 작품을 통해 사소한 것, 버려진 것, 무관심, 바닥, 비관적인 것들에 대해 사회가 규정한 위치와 평가, 접근법으로 응축된 관계를 흔들고 싶었다.
소망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예술은 중심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쓸모없는 것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라는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의 말에 기대어, 나는 나의 생산물을 통해 실패의 쓰라림에 빛을 비추고 모든 주변부와 쓸모없는 것에 따스함을 전한다. 수많은 ‘등등’의 존재에 그리고 나의 노동 생산물에 존중의 등불을 들어 발광을 획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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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G
우리는 사회문제에 대해 예술로 사유하고 말을 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간]투’는 창작의 과정을 돕는 매개체로서의 공간입니다. We believe that we can think and talk about social issues through art. ‘Art Space GONG-gan TOU’ is a space as a medium to help the creative proce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