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ve Move Move Festival
2017.12.6 ~ 12.31
이희문
디지털아웃사이더 (나가네오, 타케우치 사토루, 정고요나, 이동훈, 홍민기)
바리나모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 (연출:강화정)
움직임탐구그룹 14feet (안무:이소영)
비기자
주최 : 인디아트홀 공 기획 : 웍밴드 공 (이은정 조병희)
글: 배우리
사진: 안돌용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KAPO 문래예술공장
Move Move Move Festival
글 : 이은정
보이지만 사라지는 것,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볼 것인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보며 만족할 것인가. 낯선 것의 존재를 받아들일 것인가.
2015년 시작해 실험 공연/전시로 진행해온 단일 프로그램을 올해 2017년부터 작은 페스티발로 개최한다. Move Move Move Festival(이하 ‘뭅뭅뭅’)은 사라진 것, 사라질 것, 당신이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않을 것을 움직 ‘하는’ 과정을 통해 느끼는 ‘공연’전시다.
2014년 4월 16일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 한 마디에 많은 희생자들이 생겨난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부터 ‘뭅뭅뭅’은 시작됐다. 바다 속 깊이 침몰한 배처럼 우리들 마음 속 깊이 가라앉아 있는 슬픔과 분노가 우리를 스스로 움직이게 했다.
각자의 취향과 주관은 다르지만 ‘뭅뭅뭅’에서는 서로 다른 것들이 부딪치고 만나 하나의 공연이 되고 전시가 된다. 장르를 넘나드는 열린 태도를 바탕으로 완성된 상태가 아닌 실험적 과정의 사태를 보여준다. 몸의 움직임, 소리의 움직임, 의식의 움직임을 통해 펼쳐지는 사태는 서사보다는 추상에 가깝고 단일한 것보다는 복합적인 것에 가깝고, 개념보다는 이미지에 가깝다.
첫 번째로 실행된 ‘뭅뭅뭅’은 2015년 페스티벌 봄에 초청되었다. 소나무섬, 전유진, 한받과 쌈장들, 김혜경, 남현우, 극연구소 마찰, 오재우, 홍상표, 김소은, 김슬기, 정찬균, 박철호, 김소영, 심보선 시인과 40명의 라이브 드로잉 참여자들이 난장을 이루었다.
2016년에는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프랑스 보르도에 있는 ‘Espace29’에서 전개했다. 오재우, 전유진, 박철호와 프랑스 현지 무용수들이 국경을 넘어 개인의 불안과 더불어 사회적 공포를 공유하며 함께 세월호 사고의 슬픔에 주목한 공연전시를 만들었다.
이런 ‘뭅뭅뭅’이 페스티벌로 확장하여 인디아트홀 공에서 2017년 12월 6일부터 31일까지 세 번째 실험에 도전한다. 각자의 예술 영역 안에서 장르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는 팀 및 개인 – 이희문, 디지털아웃사이더(나가네오, 타케우치 사토루, 정고요나, 이동훈, 홍민기), 바리나모,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연출:강화정), 움직임탐구그룹 14feet(안무:이소영), 비기자 -등이 공연전시 페스티벌을 선보인다.
거대한 파도가 여러 번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들이기에, 또 다시 고민하고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 싶었다. ‘어쩌다 우리는 이 지경이 됐나’는 사후의 회한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 지경은 여전히 우리를 추동하며 움직‘하고’ 있는 멈추지 않은 광경이다.
글 : 이은정
보이지만 사라지는 것,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볼 것인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보며 만족할 것인가. 낯선 것의 존재를 받아들일 것인가.
2015년 시작해 실험 공연/전시로 진행해온 단일 프로그램
2014년 4월 16일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 한 마디에 많은 희생자들이 생겨난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부터 ‘뭅뭅뭅’은 시작됐다. 바다 속 깊이 침몰한 배처럼 우리들 마음 속 깊이 가라앉아 있는 슬픔과 분노가 우리를 스스로 움직이게 했다.
각자의 취향과 주관은 다르지만 ‘뭅뭅뭅’에서는 서로 다른 것들이 부딪치고 만나 하나의 공연이 되고 전시가 된다. 장르를 넘나드는 열린 태도를 바탕으로 완성된 상태가 아닌 실험적 과정의 사태를 보여준다. 몸의 움직임, 소리의 움직임, 의식의 움직임을 통해 펼쳐지는 사태는 서사보다는 추상에 가깝고 단일한 것보다는 복합적인 것에 가깝고, 개념보다는 이미지에 가깝다.
첫 번째로 실행된 ‘뭅뭅뭅’은 2015년 페스티벌 봄에 초청되었다. 소나무섬, 전유진, 한받과 쌈장들, 김혜경, 남현우, 극연구소 마찰, 오재우, 홍상표, 김소은, 김슬기, 정찬균, 박철호, 김소영, 심보선 시인과 40명의 라이브 드로잉 참여자들이 난장을 이루었다.
2016년에는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프랑스 보르도에 있는 ‘Espace29’에서 전개했다. 오재우, 전유진, 박철호와 프랑스 현지 무용수들이 국경을 넘어 개인의 불안과 더불어 사회적 공포를 공유하며 함께 세월호 사고의 슬픔에 주목한 공연전시를 만들었다.
이런 ‘뭅뭅뭅’이 페스티벌로 확장하여 인디아트홀 공에서 2017년 12월 6일부터 31일까지 세 번째 실험에 도전한다. 각자의 예술 영역 안에서 장르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는 팀 및 개인 – 이희문, 디지털아웃사이더(나가네오, 타케우치 사토루, 정고요나, 이동훈, 홍민기), 바리나모,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연출:강화정), 움직임탐구그룹 14feet(안무:이소영), 비기자 -등이 공연전시 페스티벌을 선보인다.
거대한 파도가 여러 번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들이기에, 또 다시 고민하고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 싶었다. ‘어쩌다 우리는 이 지경이 됐나’는 사후의 회한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 지경은 여전히 우리를 추동하며 움직‘하고’ 있는 멈추지 않은 광경이다.
뭅뭅뭅 페스티벌 #3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글 : 어쩌다 이 지경이 된 우리
2015년 시작한(이하 ‘뭅뭅뭅’)이 올해 세 번째로 움직임을 전시한다. 움직이는 부여받은 ‘사물’이 아닌 움직이는 사람들―지금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생을 위해 움직임을 행할―이 전시공간을 채운다. 움직이는 것, 움직임을 행하는 것은 고정된 사유를 흔들어 유동의 사유로 변화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움직임이야말로 어느 지점에도, 어느 시점에도 안주할 수 없는 우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시작한 세 번째 ‘뭅뭅뭅’ 페스티벌은 여전히 불안전하고 불안정한 이 시대(지경)를 돌아본다.
‘뭅뭅뭅’의 시작도 그렇지만 움직임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 숙고해봐야 한다. 도대체 왜 뭅뭅뭅, 무브를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외쳐야만 하는지와 말이다. 첫 움직임은 삶을 바로 눈앞에서 저지당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의심하지 않은 죄, 상식을 믿은 죄로 우리는 큰 상처를 입었다. 상식이 운용되는 방식까지는 미처 재단하지 않고 순진하게 믿은 죄의 대가는 컸다. 다급한 뭅뭅뭅의 첫 번째 무브는 어쩌면 논리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그저 처절하게 놀란 사람들의 몸부림 자체였다.
그렇게 첫 번째 움직임이 끝났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그리고 움직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불안뿐이다. 움직일수록 확실한 것은 없다. 계절도 바뀌었고, 공기도 바뀌었지만, 움직임에는 끝이 없다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만이 우리에게 남았다. 뉴스만 봐도 정말로 실제로 우리가 끊임없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바로 나의 지금 이 움직임을 추동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어떤 다른 무엇일 수 있다는 생각도 스멀스멀 일어선다. (그러자고 시련을 우리에게 오기를 멈추지 않는다.) 움직임의 힘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부터 출몰하며, 그 움직임은 스스로 움직인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그것이 움직이도록 내버려둠으로써만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결국 처음 우리의 위무를 위한 움직임은 무위의 움직임으로 변화한다.
무위의 움직임을 위해 채택된 이번 ‘뭅뭅뭅’ 페스티벌의 제목, 인디아트홀 공의 2017년 마지막을 장식할 제목은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다. 이 제목을 들은 많은 작가들은 적잖이 뜨악했다. 매일 일과 작업, 삶과 작업, 가족과 나, 돈과 성취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슬아슬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작가들에게 이런 생각은 하루 이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제목을 대놓고 갖다 놓다니, 예술 한답시고 고생 안하고 고상한 척 했던 것들이 까발려진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움직임이 오직 전시장 안의 작가와 관객만의 것이 아니듯, 이 공연전시를 촉발한 ‘이 지경’도 작가들만의 어두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필 작가들이 ‘우리의 지금 이 지경’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들인 이유는 누군가에 의해 고정되는 것, 어떤 것에 의해 고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하는 그들은 남들보다 약간 더 예민한 공감 능력과 예지력을 갖추고 이 지경 안에서 함께 싸우고 투쟁하면서도 이미 이 지경을 넘어서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뭅뭅뭅에 참여하는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왔다갔다 넘어다니는 방법도 모두 다르다. 이희문, 디지털아웃사이더, 바리나모,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연출:강화정), 비기자, 움직임탐구그룹 14 feet(안무:이소영)는 각각 판소리, 현대 기기, 음(音), 감정, 게임, 호흡에 움직임을 접목한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단지 ‘움직’‘한다’(動行)는 것이다.
몸에 묻힌 불안과 긴장을 한 번에 토해내는 예술가들은 결코 이 지경을 한탄하러 온 것이 아니다. 각자의 거울을 가진 현란한 움직임에는 반성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현재 ‘나’가 밟고 있는 지경계에서 한바탕 놀아볼 뿐이다. 애초에 인디아트홀 공의 공간은 그런 용도였다. 이 곳은 예술가들이 저마다 벌여놓은 요지경을 위한 장, ‘홀’이다. 그렇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움직임으로 넘어가면서 이 지경은 저 지경, 무아지경으로 넘어갈 것이다. 무아경의 다른 말이 몰입이고, 이것이 심리학용어로 ‘flow’임을 감안하면 움직임이 무아지경을 열고, 무아지경 또한 움직인다는 것이 섣부른 추축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무아지경이 다소 추상적이라면 다 집어치우고,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움직임에 부딪혀보자. 흥분이나 즐거움만이 아니라 관람할 때의 허리 아픔, 뻐근함, 다리 저림, 머리 아픔, 배고픔, 추움까지도 모두 그냥 느껴보자. 경직마저도 모두 우리 몸이 움직인다는,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몸의 증거를 아예 ‘뭅뭅뭅’의 작품으로 만들어보자는 말이다. 이 전시의 감상이 단지 ‘그들이 이렇게 움직였다’가 아니라 ‘우리는 함께 움직이게 됐다’가 되도록. 뭅뭅뭅이 세 번째에 들어 ‘페스티벌(축제)’ 꼬리를 달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글 : 어쩌다 이 지경이 된 우리
2015년 시작한
‘뭅뭅뭅’의 시작도 그렇지만 움직임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 숙고해봐야 한다. 도대체 왜 뭅뭅뭅, 무브를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외쳐야만 하는지와 말이다. 첫 움직임은 삶을 바로 눈앞에서 저지당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의심하지 않은 죄, 상식을 믿은 죄로 우리는 큰 상처를 입었다. 상식이 운용되는 방식까지는 미처 재단하지 않고 순진하게 믿은 죄의 대가는 컸다. 다급한 뭅뭅뭅의 첫 번째 무브는 어쩌면 논리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그저 처절하게 놀란 사람들의 몸부림 자체였다.
그렇게 첫 번째 움직임이 끝났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그리고 움직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불안뿐이다. 움직일수록 확실한 것은 없다. 계절도 바뀌었고, 공기도 바뀌었지만, 움직임에는 끝이 없다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만이 우리에게 남았다. 뉴스만 봐도 정말로 실제로 우리가 끊임없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바로 나의 지금 이 움직임을 추동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어떤 다른 무엇일 수 있다는 생각도 스멀스멀 일어선다. (그러자고 시련을 우리에게 오기를 멈추지 않는다.) 움직임의 힘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부터 출몰하며, 그 움직임은 스스로 움직인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그것이 움직이도록 내버려둠으로써만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결국 처음 우리의 위무를 위한 움직임은 무위의 움직임으로 변화한다.
무위의 움직임을 위해 채택된 이번 ‘뭅뭅뭅’ 페스티벌의 제목, 인디아트홀 공의 2017년 마지막을 장식할 제목은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다. 이 제목을 들은 많은 작가들은 적잖이 뜨악했다. 매일 일과 작업, 삶과 작업, 가족과 나, 돈과 성취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슬아슬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작가들에게 이런 생각은 하루 이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제목을 대놓고 갖다 놓다니, 예술 한답시고 고생 안하고 고상한 척 했던 것들이 까발려진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움직임이 오직 전시장 안의 작가와 관객만의 것이 아니듯, 이 공연전시를 촉발한 ‘이 지경’도 작가들만의 어두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필 작가들이 ‘우리의 지금 이 지경’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들인 이유는 누군가에 의해 고정되는 것, 어떤 것에 의해 고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하는 그들은 남들보다 약간 더 예민한 공감 능력과 예지력을 갖추고 이 지경 안에서 함께 싸우고 투쟁하면서도 이미 이 지경을 넘어서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뭅뭅뭅에 참여하는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왔다갔다 넘어다니는 방법도 모두 다르다. 이희문, 디지털아웃사이더, 바리나모,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연출:강화정), 비기자, 움직임탐구그룹 14 feet(안무:이소영)는 각각 판소리, 현대 기기, 음(音), 감정, 게임, 호흡에 움직임을 접목한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단지 ‘움직’‘한다’(動行)는 것이다.
몸에 묻힌 불안과 긴장을 한 번에 토해내는 예술가들은 결코 이 지경을 한탄하러 온 것이 아니다. 각자의 거울을 가진 현란한 움직임에는 반성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현재 ‘나’가 밟고 있는 지경계에서 한바탕 놀아볼 뿐이다. 애초에 인디아트홀 공의 공간은 그런 용도였다. 이 곳은 예술가들이 저마다 벌여놓은 요지경을 위한 장, ‘홀’이다. 그렇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움직임으로 넘어가면서 이 지경은 저 지경, 무아지경으로 넘어갈 것이다. 무아경의 다른 말이 몰입이고, 이것이 심리학용어로 ‘flow’임을 감안하면 움직임이 무아지경을 열고, 무아지경 또한 움직인다는 것이 섣부른 추축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무아지경이 다소 추상적이라면 다 집어치우고,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움직임에 부딪혀보자. 흥분이나 즐거움만이 아니라 관람할 때의 허리 아픔, 뻐근함, 다리 저림, 머리 아픔, 배고픔, 추움까지도 모두 그냥 느껴보자. 경직마저도 모두 우리 몸이 움직인다는,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몸의 증거를 아예 ‘뭅뭅뭅’의 작품으로 만들어보자는 말이다. 이 전시의 감상이 단지 ‘그들이 이렇게 움직였다’가 아니라 ‘우리는 함께 움직이게 됐다’가 되도록. 뭅뭅뭅이 세 번째에 들어 ‘페스티벌(축제)’ 꼬리를 달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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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G
우리는 사회문제에 대해 예술로 사유하고 말을 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간]투’는 창작의 과정을 돕는 매개체로서의 공간입니다. We believe that we can think and talk about social issues through art. ‘Art Space GONG-gan TOU’ is a space as a medium to help the creative proce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