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9km 이긴 하지만 그래서 29.8일

285.9km이긴 하지만 그래서 29.8일
박민애 현세진
2021.8.18-8.29
어떠한 대상과의 관계를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 관계를 둘러싼 다양한 수치가 있다. 이번 전시에는 박민애와 현세진 두 사람이 각자의 사적인 관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심리적 거리감과, 그에 관련한 객관적인 수치 사이의 관계를 가늠해본다. 박민애는 두 생활 터전을 오가면서 생기는, 살기 위한 방식의 차이와 변화되어가는 가족관계에서 적응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간다. 현세진은 자신의 가족 구조 안에서 달라진 관계를 발견하고 일상의 삶 속에서 시간을 두고 이를 탐색하여, 변화된 요소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두 사람의 작업은 각자 만든 규칙으로 그 안에서 변화된 자신을 발견하는 동시에 ‘중요한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285.9km 이긴 하지만

작년부터 여전히 진행 중인 재난으로, 불규칙적이지만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들어오던 수입이 끊겼다. 비슷한 시기에 가족이 운영하는 캠핑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노는 손이었던 나는 비정기적으로 그 캠핑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현재도 일하고 있다. 올해는 전에 하던 일의 일부를 다시 하게 되면서, 3월부터, 목요일 오전에 캠핑장에 갔다 일요일 저녁에 서울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고, 7월 중순부터는 본격적으로 캠핑장에서 지내고 있다. 어쩌다 보니, 벌써 생의 반 이상을 터전으로 삼았던 서울과 어린 시절 고향을 오가면서, 해야 하는 일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떨어져 생활하던 가족에게도 적응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285.9km는 서울에 있는 나의 공간과 캠핑장의 거리로 물리적 거리만큼 두 곳에서 느끼는 생활의 차이를 보여준다.

캠핑장에서 내가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깨끗이 하는 장소와 치워야 할 것들의 종류만 다를 뿐 청소가 계속된다. 우리 캠핑장은 올해 초까지는 캠핑사이트와 15개의 개별숙소가 있었지만, 최근에 캠핑사이트를 없애고 지금은 28개의 객실을 운영 중이다. 전에도 쉽지는 않았지만, 두 동생이 주축으로 운영 가능한 범위에서, 규모에 변화가 생겨 특히 요즘 같은 휴가철에는 가능한 온 가족이 매달려야 겨우겨우 시간 내 객실 청소를 마치고 투숙객을 맞이할 정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1시 체크아웃 때부터, 체크인을 시작하는 오후 3시까지이다.

‘B 캠핑장_여름’에서는 뜨거운 해와 한 번씩 쏟아지는 비로 무섭게 자라나는 풀들과 나무들이 있는 산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오는 분들이 마주할 경치와 그러기 위해 주어진 우리가 시간 내 해치워야 하는 일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적은 인력으로 운영하는 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크고 협력도 중요하다. ‘B 캠핑장 팀워크 수칙’은 그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다짐하고, 같이 일하는 동생들과 공유한 생각들 일부를 정리하여 우리의 목소리로 담았다. ‘늘어가는 이상적인 청소 매뉴얼 (ver.박민애)’ 반복되는 일에서 쌓여가는 경험과 일에 익숙해지는 동시에 더욱더 늘어가는 신경 쓰이는 부분을 놓치지 않기 위한 나만의 매뉴얼이다. / 박 민 애

박민애_B 캠핑장 여름_싱글채널 비디오 (5분 57초)_가변설치_2021
박민애_늘어가는 이상적인 청소 매뉴얼(ver.박민애)_인쇄물_2021
그래서 29.8일

유학생일 때 나는 고양이 두 마리를 입양하면서 처음으로 나의 선택으로 가족을 만들었다. 타국에서 가족의 존재는 커다란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데, 나는 긴장되거나 불안할 때 이들을 쓰다듬거나 털을 빗기고, 이들이 만족스러울 때 내는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이들은 3년 전 여름 나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결과 사람 둘, 강아지 하나, 고양이 둘이 함께 살게 되었다. 나는 ‘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이전의 관계들은 내가 놓아두고 간 지점에 그대로 있지 않아서, 이들과 다시 관계하면서 나는 다양한 (때로는 역설적이기도 한) 심리적 거리감을 느꼈다. 나의 두 가족이 합쳐지면서 구성원간의 관계도 더 복잡해져 각자의 입장과 성격에 따른 보다 정교한 상호작용이 생겨났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가장 오래전에 놓아두었던 관계에 대해서도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고양이-볼’에서는 가장 새로운 관계와 가장 오래전에 놓아두었던 관계가 연결되고, 그 결과 후자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변화되는 과정이 드러난다.

‘고양이볼(기념비)’는 이 변화가 지난 3년간 어떠한 시간적 간격을 가지고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귀국행 비행기를 탄 2018년 8월 29일부터 이 전시가 끝나는 2021년 8월 29일까지 정확히 3년의 기간 동안,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얼마 만에 봤는지를 기록하고, 그동안 모아 둔 고양이 털을 뭉쳐서 이 시간의 간격을 물질화했다. 고양이 털로 만든 공은 원래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이지만, 이는 그와의 만남을 기억하기 위한 몽실몽실한 기념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각 날짜의 간격만큼 거리를 두고 전시장에 다시 펼쳐져서, 당시에는 포착하기 어려웠던 변화의 리듬을 시각화한다. (그가 만약 이 전시장에 온다면 고양이볼 한 개가 더 추가될 예정이다.)

오랫동안 놓아두었던 관계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양쪽의 노력이 요구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만남 이후의 적당한 시간적 거리도 필요했다. 그를 만날 즈음이면 나는 적당한 시간적 거리가 얼만큼일지 가늠해 보곤 했는데 당시에는 그와의 심리적 거리가 파형을 그리며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전시를 앞두고 그동안 기록했던 만남의 빈도의 평균을 계산해, <고양이볼(기념비)>에 사용되지 않은 고양이의 털로 공을 만들어 써 넣었다. 이 고양이는 털 빗기를 싫어해서 한 번 빗을 때마다 얻을 수 있는 양이 매우 적어서, 귀국 후부터 모은 털 모두를 한데 뭉쳤다. 평균은 관계의 질이나 변화를 반영하지는 않지만, 그와 내가 관계를 이어가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를 보여준다. ‘고양이볼(평균)’의 서로 맞물려 기대어 서 있는 두 포크와 그 위에 놓인 고양이볼처럼, 나와 그의 만남은 각자가 일상 속에서 서로에게 가까워지려는 노력과 서로에게서 거리를 두려고 하는 욕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한 결과였다. / 현 세 진

현세진_그-고양이-볼_TV, TV 장식장, 1인용 의자_싱글채널 비디오, 5분 26초 _2021
현세진_고양이볼(평균)_ 맞대어 서 있는 포크 두 개, 고양이 털, 양모_가변설치_2021
현세진_고양이볼(기념비)_고양이털, 양모_가변설치_2021